서애선생

서애선생 연보(1-20세)

부용대 2018. 8. 24. 10:40

                                                                                                                   -한국고전번역원본-

서기 1542년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嘉靖) 21년 중종대왕(中宗大王) 37년 임인

10월
1일(정축) 진시(辰時) 에 선생은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선대(先代)는 안동부(安東府) 풍산현(豐山縣) 사람이다. 6대조 전서공(典書公 유종혜(柳從惠))이 처음으로 풍산현 서쪽 하외촌(河隈村)에 터를 잡았다. 의성은 선생의 외조(外祖)인 송은 처사(松隱處士) 김공(金公 김광수(金光粹))의 고향이었다.
처음 선생을 임신 중에 있을 때 대부인(大夫人)의 꿈에 어떤 사람이 공중에서 내려와 하는 말이,
“부인께서 훌륭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이오.”
했는데, 이때 와서 선생이 태어났다

서기 1543년 가정(嘉靖) 22년 계묘. 선생 2세


서기 1544년 가정(嘉靖) 23년 갑진. 선생 3세 

 

서기 1545년 가정(嘉靖) 24년 인종대왕 원년 을사. 선생 4세

 이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서기 1546년 가정(嘉靖) 25년 명종대왕 원년 병오. 선생 5세


서기 1547년 가정(嘉靖) 26년 정미. 선생 6세
《대학(大學)》을 배웠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품위와 행동거지가 어른다워서 쓸데없거나 상스러운 말들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글공부에만 전념하여 부모나 스승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한번은 강가에서 놀다가 미끄러져서 물에 빠졌었다. 같이 놀던 아이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었는데, 갑자기 물결이 크게 일더니 어느새 선생은 언덕 위에 나와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서기 1548년 가정(嘉靖) 27년 무신. 선생 7세


서기 1549년 가정(嘉靖) 28년 기유. 선생 8세

《맹자(孟子)》를 읽었다.
“백이(伯夷)는 눈으로 일체 나쁜 것들을 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귀로 음탕한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라는 구절을 읽고 개연히 그의 인간 됨됨이를 사모하여 꿈속에서 만나 보기도 하였다.

서기 1550년 가정(嘉靖) 29년 경술. 선생 9세

대부인(大夫人 어머니를 말함)을 따라 유신현(惟新縣)에 갔다.
이때 관찰공(觀察公 선생의 아버지. 유중영(柳仲郢))이 유신 현감(惟新縣監)으로 있었다.
8월
대부인을 따라 고향에 돌아왔다.

서기 1551년 가정(嘉靖) 30년 신해. 선생 10세

 

서기 1552년 가정(嘉靖) 31년 임자. 선생 11세


서기 1553년 가정(嘉靖) 32년 계축. 선생 12세 


서기 1554년 가정(嘉靖) 33년 갑인. 선생 13세

동학(東學)에서 《중용》ㆍ《대학》을 강독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처음 과거 보는 유생들에게 모두 사학(四學)에서 《중용》ㆍ《대학》을 강독하게 하였다. 선생은 이 강독에 참여하여 구두(句讀)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깊은 뜻까지도 모두 잘 알았다. 강관(講官)은 크게 칭찬하면서, “반드시 큰 학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주-D001] 동학(東學) : 사학(四學) 중의 하나이다. 조선 중종 때 서울의 동서남북에 학교를 세워 사대부의 자제를 교육시키던 학교이다. 

서기 1555년 가정(嘉靖) 34년 을묘. 선생 14세

왕부(王父 선생의 조부. 유공작(柳公綽)) 군수공(郡守公)을 임지인 간성(杆城)에 가 뵈었다.
그곳에 가 향교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곁에 뛰어난 천석(泉石)이 있었다. 글을 읽다가 시간만 나면 학우들을 데리고 가서 날이 저물도록 즐기면서, 돌아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12월
관찰공을 따라 임지인 의주에 갔다
.

서기 1556년 가정(嘉靖) 35년 병진. 선생 15세

      

서기 1557년 가정(嘉靖) 36년 정사. 선생 16세

봄에 의주에서 서울로 와서 대부인을 뵈었다.
가을,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주-D001] 향시(鄕試) : 각도(各道)에서 그 도내의 유생들에게 보이던 초시(初試)이다.


서기 1558년 가정(嘉靖) 37년 무오. 선생 17세

부인 이씨(李氏)를 맞이하였다.
현감(縣監) 휘(諱) 경(坰)의 딸이며, 종실(宗室)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대왕의 아들)의 후손이다.

서기 1559년 가정(嘉靖) 38년 기미. 선생 18세

5월
군수공이 죽었다.
8월
관찰공을 따라 군수공의 상여(喪輿)를 받들고 남으로 고향에 가다가 중도에서 병을 얻어 서울로 돌아왔다.
겨울에 여소(廬所)에 계신 관찰공을 가 뵈었다.
그때 관찰공이 군위(軍威) 송현(松峴)에서 여묘(廬墓)를 살았다

서기 1560년 가정(嘉靖) 39년 경신. 선생 19세

여소에서 관찰공을 계속 모시고 있었다.
선생이 일찍이 여러 친우들과 남계(南溪)에 놀러 가서 수석(水石)을 둘러보고, 시를 읊고 이어 탄식하였다.
“내가 성인(聖人)의 문하(門下)에서 놀게 되었다면, 단목씨(段木氏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의 성)만큼은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가을에 서울로 돌아왔다.
10월
관악산에 들어가서 《맹자》를 읽었다.
선생이 산사에 가니, 글 읽는 이가 많았다. 선생은 번잡한 것이 싫어서 비어 있던 암자를 수리하여 따로 거처하면서, 밥 짓고 나무하는 동자 한 명만을 데리고 공부에 몰두하여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밤이 깊으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따끔 들리기도 하였으나, 선생은 못 들은 체하였다. 어느 날 밤엔 승려가 불쑥 나타나서, 말하기를,
“깊은 산속에 홀로 있으니 도둑이 겁나지 않소?”
하니, 선생은 빙긋이 웃으면서,
“사람은 본디 헤아릴 수 없으니, 그대가 도둑질을 안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승려는 아무 대꾸도 없이 슬슬 문밖으로 나가서 의심이 나도록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아랑곳없이 글만 읽자, 그는 다시 절을 하고는,
“젊은 서생(書生)으로서 의지가 이다지도 굳으니, 후일에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오.”
라고 말하였다. 이는 승려가 선생이 공부를 독실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밤에 일부러 도둑같이 꾸며 가지고 선생의 지기(志氣)를 떠보려고 한 것이었다.
 

서기 1561년 가정(嘉靖) 40년 신유. 선생 20세

고향에 돌아와서 《춘추》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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