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酉年 墓所 正謁禮
정유년 정월 초 3일 묘소 정알례 정일 이다,
2015년 까지는 정월 초3, 4, 5일 정일로 되어 있었으나
2015년 문회에서 정월 초3일을 정일로 하고 능동, 수동, 화산순 으로 하기로 하여
많은 자손이 참석하게 되었다,
능동 입암선조 정알례후 참례자
입암선조 묘소, 외손봉사위 평창위 묘소, 권태사 묘소
위에선본 삼위 묘소
입암선조 묘소 문인석
입암선조 묘전비
선고황해도관찰사부군묘지
先府君의 휘는 仲郢이요, 자는 彦遇며, 姓은 柳氏니 대대로 안동부 풍산현인이었다. 8대조 휘 伯이 고려조에 벼슬하였으며, 그후 蘭玉은 都染署令이요. 휘 葆는 版圖判書요. 判書의 아들 휘 從惠는 조선조에 들어와 工曹典書를 지냈으며, 그 아들 휘 洪은 左軍司正이었으니 즉 부군의 고조부이다. 증조의 휘 沼는 副護軍으로 증직이 司僕寺正이요. 조의 휘 子溫은 成均進士로 증직이 刑曹參議요. 考의 휘 公綽은 杆城郡守로 증직이 嘉善大夫 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요, 妣 延安李氏는 敎授로 증직이 吏曹參議인 亨禮의 따님으로 역시 증 貞夫人이니 모두 부군 때문이었다.
府君이 中宗 10年 乙亥(1515년) 正月 12日에 태어나셔서 겨우 네 살에 모부인을 여의셨다. 점차 자라나시며 학업 힘쓰시고 庚子年(1540년, 26세) 문과에 급제하시어 成均館에 보직 되어 學諭 와 學錄, 學正을 거처 博士에 이르셨다.
이 때 부자 상인이 成均館소속 전답을 제멋대로 경작하는 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호조에 제소하자 판서가 상인을 비호하거늘 부군이 항의하니 판서가 노하여 부군을 모함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그 전답은 마침내 성균관 소속 학전으로 귀속 되었다. 다시 博士에 보직 되셨다가 권세 있는 재상에게 노여움을 사서 또 파직 되셨다.
己酉年(1549년)에 典籍으로 승진하셨으며 司憲府監察과工曹佐郞을거쳐惟新縣監으로 가셔서 선정을 베푸시니 불과 몇 달 안에 온 고을이 다스림을 칭송하였다. 이때 이 고을에 새로 큰 獄事를 격고 나서 권세를 제멋대로 하는 간신들이 저희들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암암리에 해치고자 무리를 지어 역모한다고 무고 하고 부군이 올리신 문안에 대하여 노하고, 불시에 체포 신문토록청하니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다행히 임금이 그 애매함을 알고 다만 파직에 그쳤다.
辛亥年 (1561년)에 다시 刑曹正郞이 되었으며, 御史로 平安道軍政을 감찰하셨다. 工曹正郞으로 전근되었다가 宗簿寺와 掌樂院僉正으로 승진되셨고 또軍器寺副正으로 승진되셨다.
癸丑年(1563년)에 敬差官의 명령을 받들고 전라도에軍籍을바로잡을때관리와백성들 이 부군의 귀신같이 명철하다고 칭송하면서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돌아와 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장관이 그 권세를 믿고 매사를 제멋대로 처단 하므로 부군이 날마다 논쟁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 화를 입을 가봐 우려 하였으나 부군께서는 태연하셨다. 경복궁을 수리하는데 회릉(懷陵)에서 채석하려 하려할 때 부군이 아뢰기를 “懷陵이 비록 덕을 잃고 폐출되었으나 역시 지난 날 국모였거늘 어찌 다른 곳에 채석할 수가 없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씀을 따랐다.
李希顔은 초야에 묻혀있던 선비인데 불러드려서 현감을 시켰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자 조정에서 처벌하려 하거늘 부군께서 또 아뢰기를, “조정이 선비를 대우함에는 마땅히 예절을 숭상하고 염치를 배양시켜 속박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한 번 벼슬을 버렸다고 갑자기 가혹하게 법으로 다스리면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예절에 흠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비록 그 건의가 받아드려지지는 못하였으나 듣는 사람들은 모두 옳다고 하였다.
司僕寺正으로 승진되자 臺諫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掌令이 되셨다.
甲寅年(1564년)에 司諫院 司諫 掌樂院正으로 승진되셨다.
乙卯年(1565년)에 호남과 영남에 巡邊使를 파견하여 왜적을 막게 하였는데 각각 두 사람의 종사관을 데리고 가도록할 때 부군께서 曺光遠을 따라 경상도로 내려가셨다. 이 때 변방의 정보가 급박하여 인심이 소란하였는데 많은 군무대비를 부군에게 의지하였다.
부군이 임기 응대하여 위의를 정제하고 조용하게 대처하여 전 道가도움을 입었다. 통정대부로 발탁되어 義州牧使가 되어 간사한 백성들과 중국 사람이 서로 짜고, 국경지대에서 노략질하는 여러 도적떼를 처벌하고 기율을 엄하게 하여 국경의 방비를 견고하게 하니 백성들은 크게 편안하였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져 임금이 옷의 겉감과 안집 일습을 포상으로 하사하였으며 뒷날 고을 사람들은 선정비를 세웠다. 그리고 의주에 계실 적에 중국 북경에 가는 통역관이 금지된 물건을 사사로이 가지고 갈 수 없도록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으며, 한편 이런 사건 등으로 권세 있는 귀인에게 노여움을 쌓아, 원한을 품은 여러 사람들이 모함하였으나 부군께서는 조금도변명하지 않으셨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와 호군(護軍)이되셨다가 僉知中樞府事로 바뀌었다.
己未年(1569년)에 부친의 상사를 당하셔서 복상기를 마친 뒤에僉知中樞府事 직함 그대로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중국 북경에 말을 받치고 돌아와서 刑曹參議에 임명 되었다가 호군(護軍)으로 교체되고 이어 黃海道觀察使 겸 兵馬水軍節度使가 되셨다. 승진과 퇴출의 상벌을 분명히 하고 교활한 토호들을 억누르고 부역을 공평하게하며 송사를 지체하지 않으니 백성들의 칭찬과 경모가 늘어났다. 그리고 작성고(作成庫)를 지어서 쌀과 포백을 저장하여 문헌당(文憲堂)5)의 재정을 넉넉하게 해주어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丙寅年(1576년)에 定州牧使가 되었다가 戊辰年(1578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곧바로 驪州牧使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던 중에 갑자기 淸州牧使가 되었다. 이 때 부군께서 잇달아 외부로 나가, 고을을 지키게 되니 식자들이 조정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겼다. 청주에서는 충주나 牙山과의 거리가 같았는데 옛 관례에 따라 납세를 아산만을 경유하여 해로로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운반 도중 배가 침몰하면 백성에게 다시 조세를 거두었다. 이에 부군께서 감사께 말씀드려 충주에서 배로 한강을 편안히 타고 한양에 도달토록 개정함으로써 백성들은 피해를 면하게 되었다. 무릇 수해와 한재가 있으면 반드시 미리 계획하여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종일토록 노심초사하셔서 스스로 편안히 쉴 겨를이 없었다. 떠돌아다니는 백성들, 놀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이 처음에는 비록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르는 곳마다 향교를 수리하고 서원을 지어 학도들을 모아 가르치게 하는 한편, 계절 따라 고을 안에 나이 70~80 되는 노인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어 각기 자제들을 거느려 오게 하여 도로에서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게 하니 이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매우 훌륭한 행사라고 치하하였다. 어사가 이 일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또 옷의 겉감과 안집 일습을 하사하고 포상하였다. 3年만에 교체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공론에 부군이 한가롭게 계시면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이듬해에 兵曹參知가 되었고 參知를 거쳐서承政院 同副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이 되었다가 右副承旨로 승진되고 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많은 의견을 아뢰었다. 그러나 부군께서는 이미 노쇠하였다. 선조 6年 癸酉(1573년)에 부군의 연세가 59세가 되어 3月에병환으로 承旨에서 禮曺參議로 교체 되었으며 4月에 다시 承旨에임명되었다가 6月에 병환에 감염되고 7月 13日에 마침내 서거하시자 원근이 몹시 슬퍼하였으며 임금은 예관을 시켜 조문 치제하고 부의를 하사하는 한편 관구가 돌아가는 길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아! 부군께서 성실하고 신의로우심과 너그럽고 후덕하심은 천성에서 우러났고 몸가짐과 사람을 대하는 것은 성의에 근본 하였다.
평생토록 굳건하게 심신을 다 받쳐 나라에 충성할 뜻을 갖고 계셨음이 각종 시설에 나타나 있고 또 모두가 명백하게 통달 하였음에도 지위는 지방관에 불과 하였고 수명이 육십에 미치지 못한 채 뛰어나신 큰 재능과 높으신 덕이 가라앉고 막혀서 세 상에 펼치지 못하였으니 그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배위 貞夫人 安東金氏는 進士 光粹의 따님이다. 3男3女를 두었는데 장남 文龍은 요졸하였고, 다음 雲龍은 유학을 닦아 음직으로 典艦司 別坐가 되었고, 다음 成龍은 弘文館修撰이 되었으며,女는 士人 李潤壽, 金宗武, 參奉 鄭好仁에게 출가하였다. 雲龍이參奉 李容의 따님과 혼인하여 2女3男을 두었으니, 女는 金弘微에게 출가하였고, 男은 正甫, 純甫니 모두 어리다. 成龍이 縣監 李坰의 女와 혼인하여 1男1女를 두었다. 李潤壽가 1男1女를 두었고 金宗武가 1女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그해 11月에 安東府 관내 天燈山의 子坐午向 둔덕에 안장하였으니 바로 부군의 외고조 權氏묘 아래이며 그 위의 첫째 묘는 權氏의 시조 幸의 묘이다. 柳氏의 護軍府君으로부터 이하 여러 선영의 묘가 모두 이 산중에 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墓所에 墓誌가없을 수 없기에 不肖孤가 무능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삼가 피눈물로써 그 대개를 위와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였으며, 별도 당세秉筆者에게 碣銘을 청하여 묘소 길을 알리면서 영원히 전해가고자 한다. 한없이 넓고 큰 부모님 은혜에 가슴이 메어집니다. 아 슬프도다.
불초고 성룡 삼가 적다.
망두석
권태사 묘전비
권태사 묘전비 서애선조 찬
수동 서애선조 알례후 참례자
수동 장알례 재배
수동 서애선조 산소
서애선조 묘전비 졸재선조 찬
화산 겸암선조 정알례후 참례자
화산 겸암선조 묘소
화산 겸암선조 묘소앞 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