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선생

서애선생 연보(21-40세)

부용대 2018. 8. 24. 11:42

서기 1562년 가정(嘉靖) 41년 임술. 선생 21세

7월
기망(旣望)에 관찰공이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강(赤壁江) 놀이를 주제로 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선생은 즉시 근체(近體)로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밝은 달 맑은 바람 만고에 있건마는 / 月白風淸空萬古
이름만 남겨 두고 사람은 떠나간 지 몇천 년인가 / 名留人去幾千年
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판서 이준민(李俊民)이 그것을 보고 못내 칭찬하였다.

8월
관찰공이 서울에 가는데, 남교(南郊)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관찰공이 관압사(管押使)로 서울에 갔다.
9월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 선생을 찾아뵙고, 수개월을 머물면서 《근사록(近思錄)》 등을 수업하였다.
이때부터 성리학에만 전념하면서 실천적인 것을 강구하여 반드시 성현으로 지표를 삼으니, 퇴계 선생이 크게 칭찬하였다.
○ 얼마 후 선생은 금계(金溪)에 있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갔다.
김학봉은 선생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퇴계 선생을 모신 지 오래되었으나, 한 말씀도 칭찬받은 일이 없었는데 공은 선생을 한 번 뵈었는데도 선생이 바로 ‘이 사람은 하늘이 낸 바로,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공은 어떻게 스승에게서 이러한 칭찬을 받게 되었소?”
또한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서애(西厓)는 나의 스승이다.”
라고 말하였고, 선생도 전에,
“학봉은 내가 따라갈 수 없다.”
라고 하였으니, 그분들의 교제는 서로를 높여 줌이 이와 같았다.

서기 1563년 가정(嘉靖) 42년 계해. 선생 22세

가을 생원진사(生員進士)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하였다.
[주-D001] 동당초시(東堂初試) : 유생들에게 시험 보이는 것으로 초시와 복시(覆試)가 있다. 동당은 본래 진(晉) 나라의 궁전인데 극선(郤詵)이 이 동당에서 시험을 본 것에서 유래하여 식년과(式年科)를 뜻한다.

서기 1564년 가정(嘉靖) 43년 갑자. 선생 23세

7월
생원(生員) 회시(會試)에 1등, 진사에 3등을 하였다.
퇴계 선생이 남에게 준 편지에,
“이현(而見 유성룡)은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그 사람 형제의 취향이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황해도에 있는 관찰공을 가 뵈었다.
이때 관찰공이 황해도 관찰사였다.
[주-D001] 회시(會試) : 초시에 급제한 자가 서울에 모여 다시 보는 시험이다.

서기 1565년 가정(嘉靖) 44년 을축. 선생 24세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이때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대왕의 비(妃))가 불교를 자못 믿었다. 보우(普雨)라는 중이 그로 인해 현혹하여 이해 3월에 회암사(檜巖寺)에서 무차회(無遮會)를 크게 베풀고 한 달이 지나서야 마쳤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문정왕후가 죽자 민간에 파다하게 떠도는 말이,
“보우가 여러 날 재(齋) 올리기를 요구한 때문에 왕후가 병들었다.”
하여 사람마다 모두 분개하였다.
이 때에 태학생들이 여러 번 상소하여 보우를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상소문이 선생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내용이 절실하고 조리가 분명하여, 한때 돌려 가면서 읽었다. 얼마 후, 태학생들은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여 학관을 비워 두고 떠나가기로 하고,
“감히 학관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당적아세(黨賊阿世)하는 놈으로 지목한다.”
고 약속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우리가 임금에게 간하다가 받아 주지 않기 때문에 가는데, 다른 이름을 붙일 게 없어서 굳이 ‘당적아세’라고 하는가?”
하였다.
여러 태학생들은 모두 소매를 걷어 올리고 큰소리로,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였는데, 그대는 어째서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가?”
하면서 재삼 협박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굽히지 않고 점신오명(玷身汚名)이란 넉 자로 바꾸었다.
[주-D001] 무차회(無遮會) : 불교에서 행하는 법회. 성범(聖凡)ㆍ도속(道俗)ㆍ귀천(貴賤)ㆍ상하(上下)의 구별 없이 일체 평등으로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행한다.

서기 1566년 가정(嘉靖) 45년 병인. 선생 25세

봄에 관찰공을 모시고 정주에 갔다. 이때 관찰공이 정주 목사(牧使)로 갔다.
여름에 서울로 돌아왔다.
황강(黃岡)을 지나던 중, 그날 밤 꿈에 맏형 겸암공(謙巖公)이 여윈 모습으로 병들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사실 겸암공이 병들어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10월
급제하여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선생은 평소 관직에 뜻이 없었다. 비록 부형의 명으로 인해 억지로 과거를 보아 급제를 하였지만, 즐겨서 한 것은 아니었고, 아직 관직을 맡기 전까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공부하려고 하였다. 퇴계 선생이 그런 말을 듣고 겸암공에게 보내온 시에,
그대의 아우 처음 급제로 / 更憐賢季初攀桂
얽매이게 될 세상일에서 벗어나려는 뜻 가상하다 / 萬事將纏欲脫纏
라는 구절이 있었다.

11월
선발되어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선발되어 보해졌다.

서기 1567년 목종황제(穆宗皇帝) 융경(隆慶) 1년 정묘. 선생 26세      

봄에 정자(正字)로 승진되었다. 휴가를 얻어 정주에 가서 관찰공을 뵈었다.
4월
천거되어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을 제수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6월
명종대왕이 승하하셨다.
8월
고향에 가는 퇴계 선생을 전송하였다.
광진(廣津)까지 뒤따라가 송별시를 지었다.
자문 점마(咨文點馬)로 의주에 갔다.
의주로 가던 중 정주에 들러 관찰공에게 문안드렸다.
10월
조정에 돌아왔다.


서기 1568년 융경(隆慶) 2년 선종대왕 원년 무진. 선생 27세

2월
휴가를 얻어 정주에 가서 관찰공을 뵈었다.
이때 정관재(靜觀齋)에서 ‘봄날의 느낌[春日有感]’이란 시 한 수를 지었다.

큰 도는 입과 귀로 전하기 어려우나 / 大道難從口耳傳
이 마음 간 곳마다 저절로 유연하여라 / 此心隨處自悠然
헌함 밖에 실버들 이슥히 바라보니 / 靜觀軒外千條柳
가지마다 봄빛이 하나같이 찾아드네 / 春入絲絲不後先

3월
조정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왕명을 받아 성주(星州)로 가서 포사(曝史 사책(史册)을 볕에 쬐고 바람을 쏘이는 일)하였다.
성주로 가는 길에 고향에 들러 하외(河隈)에 있는 겸암공을 뵙고 갔다.
대교(待敎)에 올랐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서기 1569년 융경(隆慶) 3년 기사. 선생 28세

상소하여 인종을 연은전(延恩殿)에 부(祔)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처음 세종이 종묘 밖에 따로 문소전(文昭殿)을 짓고, 태조와 사친(四親)의 신주를 받들어, 살았을 때의 예로 섬겼다.
성종이 덕종(德宗)을 추숭(追崇)하였으나, 예종의 신주를 이미 문소전에 모시었기 때문에 덕종의 신주를 별전에 모시고서 연은전(延恩殿)이라 불렀다.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당시에 의논이 일어났다.
“인종의 신주를 모시게 되면 세조는 마땅히 체천(遞遷)해야 되겠지만, 명종에게는 친함이 다하지 않았다 하여 체천하지 않는다면 오실(五室)이 넘으니, 세종의 뜻이 아니다.”
그래서 인종의 신주를 연은전에 모셨더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
이때 와서 명종의 복상을 마쳤다. 예관(禮官)은 인종의 신주와 문소전에 같이 모시기로 청하여, 의논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후침(後寢)과 전전(前殿)이 모두 좁아서 신주 6위를 용납할 수 없다 하여, 후침 동편에 한 칸을 더 드리고 앞서 사친의 신주와 합쳐서 6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세조의 신주를 체천한 다음 각위의 신주를 차례로 모셨는데, 전전에서 협제(祫祭)할 때만 태조를 가운데 모시고 사친의 신주는 동과 서로 마주 향하게 하여 소목(昭穆)의 차례로 삼았다. 인종과 명종은 비록 형제로서 동일한 위(位)에 있어야 되겠지만 집이 달라서 신위를 설치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대신과 예관들이 재삼 봉심하였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퇴계 선생이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전전의 제도가 동서는 길고 남북은 짧습니다. 만약 옛사람의 제도대로 태조는 동향의 위(位)에 정해 놓고, 이소(二昭)와 이목(二穆)은 차례대로 남과 북으로 마주 향하게 한다면, 전각 안이 넉넉하게 되어 새로 고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복고(復古)하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때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이었다. 그는,
“조종(祖宗)에서 정한 좌향은 쉽게 변경할 수가 없으니, 인종의 신주는 그대로 연은전에 모시고 명종의 신주만 모시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선생은 상소하여 옳지 않은 처사라고 적극 주장하였더니, 영의정 이준경도 상소하여 자신의 뜻을 해명하고 다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랐다.
승진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고, 공조 좌랑에 옮겨 제수되었다.
휴가를 얻어 청주에 계신 관찰공을 가 뵈었다. 이때 관찰공이 청주 목사였다.
서기 1570년 융경(隆慶) 4년 경오. 선생 29세      

3월
연경에서 돌아왔다.
돌아와서,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 연경에 있을 때 태학생들과 주고받은 말들을 대강 이야기하였다. 퇴계 선생은 그 글에 답하기를,
“육상산(陸象山)의 학설과 왕양명의 학술이 온 천하에 퍼졌는데, 그대가 이러한 정론을 펴서 비뚤어진 견해를 지적하였으니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였다.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고, 수찬에 올랐다.
선생이 일찍이 경연에서 귀신에 대한 이치를 강론하였는데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맑게 개었을 때는 한 점 구름의 기운이 없다가도 홀연히 산천에서 구름이 일어나 잠깐 동안 천지 사이에 가득 차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내리쳐 비가 내리며, 조금 있다가 비가 그치게 되면 말끔히 개어서 다시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이는 흩어졌던 기운이 한곳에 모였다가 때에 따라 쓰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에 정성으로 감동하여 부르면, 조상이 감동하여 이르러 엄연히 있는 듯하다가도, 제사가 끝나면 다시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성의가 있으면 신이 있고, 성의가 없으면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이 또 천수와 인사에 관한 것을 묻자 대답하였다.
“천수란 추위나 더위와 같고, 인사는 가죽이나 갈포옷과 같습니다. 추위와 더위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변동할 수 없지만, 가죽옷이나 갈옷을 갖추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는 성인들이 천수는 말하지 않고 오로지 인사만을 말한 까닭입니다.”
선생이 옥당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흔쾌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입대(入對)할 때마다 마음가짐을 가다듬고 성의를 다하여 의리를 진술하고 정밀한 뜻을 분석하며 고금을 인용하면서 납득이 가도록 간곡하게 설명하니, 상이 항상 칭찬하였고, 한때 사대부들이 추대하여 강관의 제일로 삼았었다.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늘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유 수찬(柳修撰)같이 어려운 일을 실행하도록 권고하고 착한 도리를 말해 주는 이가 또다시 있을까.”
하였다.
○ 어느 날 경연에 입시하여 진강을 끝내자,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아뢰었다.
“오직 대신이라야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사람을 등용하는 데는 차례가 있습니다. 백인걸(白仁傑)이 감히 관례를 깨뜨리고 사람을 천거하여 6품에 올랐고 천거된 사람도 인망(人望)에 맞지 않는 사람이니, 매우 부당한 처사입니다.”
선생이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천거된 사람이 만약 대감의 말대로라면 참으로 취할 게 못 되지만, 대감의 말씀도 어폐가 없을 수 없습니다. 가령 백인걸이 과연 훌륭한 사람을 얻었다면, 그도 이미 재경의 지위에 있으니, 어찌 감히 천거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만일 꼭 대신이 천거한 뒤에 등용할 수 있다면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버려두는 폐단은 반드시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물러 나온 뒤에 이 수상(李首相)이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유 수찬이 나의 잘못을 지적하여 논박하니, 그의 말이 매우 옳았다.”
하였다.
휴가를 얻어 청주에 갔다가 얼마 안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가을에 사가 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12월
퇴계 선생의 부고를 받고 통곡하였다. 여러 문인들과 학봉의 집에 모여서 통곡했다.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서기 1571년 융경(隆慶) 5년 신미. 선생 30세

휴가를 얻어 청주에 문안드리러 갔다.
3월
예안에 가서 퇴계 선생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어느 날 병조에서 숙직을 하는데, 밤중에 느닷없이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서로들 치고받고 하였다. 같이 숙직하는 이는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선생은 태연하게 그대로 누워 있으니, 얼마쯤 지나서 저절로 잠잠해졌다.
6월
장단에서 종조숙부(從祖叔父)인 대헌공(大憲公) 경심(景深)의 초상을 당하였다. 이때 대헌공이 평안 감사였는데, 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오다가 도중에서 운명하였다.
가을에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버이를 가 뵈었다.
낙동강 서쪽 언덕[西厓]에 서당을 지으려 하다가 터가 좁아서 결정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서애로 호를 삼았다. 그후에 그 언덕을 상봉대(翔鳯臺)라 이름하였다.

서기 1572년 융경(隆慶) 6년 임신. 선생 31세

봄에 다시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는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때 영중추부사 이준경(李浚慶)이 임종할 때 올린 유소(遺疏)에,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붕당이 점점 일어나고 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었다. 상이 대신들을 불러 그 상소를 보여 주며 묻기를,
“조정에 붕당이란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한 말이오.”
하였다. 외부의 흉흉한 의논들이,
“이상(李相)이 선비들에게 화를 입히려 한다.”
하였고, 삼사(三司)에서는 제가끔 차자를 올려 논박하였다. 독서당관(讀書堂官) 정철(鄭澈)과 홍성민(洪聖民) 등도 차자를 올리려고 사람을 보내 선생을 초청하였다.
선생은 옥당에서 직제학(直提學) 윤근수(尹根壽)와 전한 정유일(鄭惟一)과 함께 가서 참석하였다. 정철은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상의 관작은 마땅히 추탈(追奪)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선생은 그 말에,
“대신이 임종할 때 올린 말이 맞지 않으면 변론할 따름이지 어째서 관작을 추탈한단 말이오.”
하였더니, 정철은 발끈 화를 내며,
“그대는 어째서 이해를 생각하는가?”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한 몸의 이해라면 진실로 생각할 수 없지만, 국가의 이해도 살펴보지 말란 말이오? 지금 만약 관작의 삭탈을 청한다면 내 생각으로는 국가의 체통을 해칠까 염려되오.”
하였다. 여러 사람의 의논은 선생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정철은 얼마 동안 논쟁을 하다가 끝내 선생의 뜻을 빼앗지 못하고 드디어 정유일을 시켜 상소문을 지었는데 너무 심한 말은 없었다. 선생은 일찍이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그때 만일 다른 의논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상(李相)이 추탈을 당하였다면 그 당시 정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오.”
하였다.
○ 상이 일찍이 경연에서 여러 신하에게, “나는 어떤 임금인가.” 하고 물었다. 정이주(鄭以周)는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요순(堯舜) 같으신 임금입니다.”
하였다. 김성일은,
“전하께서는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의 표정이 싹 변하여 경연에 있는 이는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생이 진언하기를,
“정이주가 요순이라 대답한 것은 임금을 요순이 되게 인도한 말이옵고, 김성일이 걸주라 비유한 것은 임금이 걸주같이 안 되도록 경계한 말이오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기뻐하여 낯빛을 고치고, 영을 내려 술을 나누게 하고서 파하였다.
9월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의주에서 반조사(頒詔使)를 맞이하였다.

서기 1573년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1년 계유. 선생 32세

4월
아들 위(褘)가 탄생하였다.
6월
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7월
13일(신묘) 관찰공의 상을 당했다.
관찰공이 6월부터 뇌후종(腦後腫)이 생겨서 증세가 날마다 악화되었다. 선생은 밤낮없이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면서, 의대(衣帶)도 풀지 않고 눈을 붙이지 않았으며, 늘 환부(患部)를 빨아서 고름[膿血]을 뽑았다. 운명을 하자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여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8월
영구(靈柩)를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1월
8일(갑신) 천등산(天燈山) 금계(金溪)에 장사 지냈다. 이날 하외(河隈)에 반곡(返哭)하였다.
상례는 모두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따랐다. 장사를 치르기 전에는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었고 1년 동안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상사(喪事)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고, 3년 안에는 상복을 벗은 일이 없었다. 겸암공과 번갈아 산소 옆을 지키고,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되 아무리 큰 추위나 더위나 비가 내려도 한결같이 하였으며, 초하루ㆍ보름 때면 반드시 돌아와서 궤연(几筵)에 전(奠)을 올렸다.
[주-D001] 11월 : 원문에는 12월로 되어 있으며, 1632년 간행 목판본(木版本), 1894년 목판본(옥연서원(玉淵書院) 중간본)에도 12월로 되어 있으나, 《한국사(韓國史)》 삭윤표(朔閏表), 《만세력(萬歲曆)》을 참고해 보면 동년 12월에는 갑신일이 없다. 장례법에도, ‘사(士)는 석 달 만에, 대부는 다섯 달 만에 장사 지낸다.’ 하였으며, 관찰공이 7월에 죽었으므로 11월의 오식인 듯하다.

만력(萬曆) 2년 갑술. 선생 33세


만력(萬曆) 3년 을해. 선생 34세
9월
상복을 벗었다.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또다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서기 1574년 만력(萬曆) 4년 병자. 선생 35세

1월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부임하다가 도중에서 사양하고 돌아왔다.
원지정사(遠志精舍)가 완성되었다. 정사는 마을 북쪽 강 언덕 위에 있으며 다섯 칸이다. 기문(記文)이 있다.
4월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이때 고려 태조의 화상이 풍기 소백산 어느 절에 있었는데, 승려들이 존경할 줄을 몰라서 그을음과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선생은 경연에서 사신을 보내어 마전(麻田) 숭의전(崇義殿)에 옮겨 봉안(奉安)하자고 건의하여 허락이 내렸다.
○ 이때 대간 정언신(鄭彦信) 등이 척리(戚里)에 대하여 논계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조에서는 갑자기 논계한 대관들을 북로(北路)의 고을 원으로 내보내자고 주의(注擬)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이러한 징조를 키워서는 안 된다.”
하고, 즉시 계사(啓辭)를 작성하여 대궐로 가다가 길에서 이조 전랑(吏曹銓郞)을 만났다. 그 사람이 선생에게 묻기를,
“오늘 논계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하였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지금 나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탄핵문(彈劾文)은 이조에 관한 것이오. 대관들이 한번 입을 열어 척리에 대한 것을 논계하였는데, 이조에서 갑자기 쫓아내려 합니다. 이러한 기풍이 한번 생기게 되면 언로는 막히게 되고, 척리만 횡포를 부리게 될 터인데, 그대들이 하는 처사는 어째서 이렇게 잘못하는가?”
하고, 그 길로 들어가 논계하였다. 그래서 문제의 전관(銓官)은 모두 교체되었고, 논계한 대관은 쫓겨나지 않았다.
의정부 검상(檢詳)에 전임되었고, 또 홍문관 전한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는데, 사헌부 장령에 옮겨 제수되었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조정에 돌아왔다.
12월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노모의 봉양을 주청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늙으신 어머니가 올해 65세로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 슬픔만 더해 가옵니다. 신(臣)이 아침저녁으로 봉양해 드리지 못하고 천 리 밖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으니, 약물을 늘 제때에 공급해 드리지 못하여 건강 유지를 못하게 될까 언제나 걱정이온데, 이러한 생각만 하면 간장이 녹아내립니다.
옛 선왕들은 효도로 천하를 다스려 누구나 부모를 봉양하고 싶으면 모두 임금에게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그 시에,
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사오리까 / 豈不懷歸
이래서 노래지어 아룁니다 / 是用作歌
늙으신 어머니 봉양하겠노라고 / 將母來諗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도, 인자(人子)들의 사정에 따라 편의를 보아주신 은혜가 더욱 많았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불쌍하게 배려한 은혜를 입어 호령(湖嶺) 중에 조그마한 고을을 맡기셔서, 신의 능력을 다하여 백성의 일을 다스리게 하시고, 사적으로는, 받는 녹봉(祿俸)으로 임종에 가까운 어머니를 봉양하게 해 주신다면 신의 모자가 목숨을 다 바쳐도 그 은혜를 갚기 어려울 뿐만 아니오라, 국가에서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에도 빛이 날 것이옵니다.”
이와 같이 상소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주-D001]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후보자를 선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일이다.

서기 1575년 만력(萬曆) 5년 정축. 선생 36세

1월
의정부 검상에 제수되었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2월
군위의 선산을 찾아가 성묘하였다.
여름에 사인으로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상소로 봉양하기를 주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퇴계 선생 봉안문(奉安文)을 지었다.
10월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동료들과 을사년(1545, 인종1)의 공신록(功臣錄)을 삭제하자고 논계하였다.
11월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승하하였다.
이때 예관과 대신들이 의론을 결정하고, 상에게 기년상(朞年喪)을 주청하였다. 선생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명종이 인종에 대해서 대통을 이은 의리가 있으니, 상께서는 마땅히 적손(嫡孫)으로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조모를 위하여 승중복(承重服 아버지 대신 할머니 복(服)을 입는 것)을 입는 관례를 따라야 한다.”
하고 곧 승정원에 나가 의식 절차를 고쳐 결정하자고 아뢰어 청하니, 예관에게 다시 의논하라는 전갈이 내려졌으나 대신과 예관들은 전자의 의논을 고집하였다.
그 다음날은 성복(成服) 날이었다. 선생은,
“만약 오늘 계청하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라 하고, 동료들과 밤새도록 논계하여 새벽닭이 울 무렵에서야 윤허를 받아 끝내 삼년복을 입기로 결정하였다.
○ 이에 앞서 상이 경연에서 《시전(詩傳)》을 강독하였는데, 졸곡(卒哭) 후에 경연을 속개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시전》은 노래 가사에 불과하니, 《춘추》로 대신하옵소서.”
하였다.
[주-D001] 성복(成服) : 초상이 나고 사흘이나 닷새 뒤에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절차이다.
[주-D002] 졸곡(卒哭) :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로 사람이 죽은 지 3개월 후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 지낸다.

서기 1577년 만력(萬曆) 7년 기묘. 선생 38세

봄, 홍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다.
4월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제수되었다.
과거에는 승정원에서 쓰는 종이가 너무 넓고 두꺼워서 비용이 한이 없었다. 이때에 선생이 건의하여, 한 달분의 양을 규정하여 남용하지 못하게 하고, 또 종이의 품질을 두껍지도 넓지도 않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7월
체임되어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체임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상이 본도(本道)에 음식물을 대접하라고 명하였다.
이번 길에 이덕홍 굉중(李德弘 宏仲)과 함께 배를 타고 ‘학문을 의논하다 느낌[論學有感]’이란 두 편의 시를 지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천성이 전한 심법 탐구할 도이건만 / 千聖傳心道可求
십 년을 벼슬길에서 벗어나기 못하였네 / 十年塵路未回頭
더없이 탄식하노라 가을 강 늦 경치를 / 相逢絶歎秋江晩
그대 따라 노를 저어 원류를 찾고 싶네 / 理棹從君欲泝流

큰 도는 본디 두 갈래가 아니건만 / 大道由來不二門
애닯도다 말학들은 공언만 일삼네 / 堪憐末學逞空言
갑자기 참 소식이 새어 나왔구나 / 居然漏泄眞消息
뛰노는 고기와 나는 솔개가 다 같이 한 이치인데 / 魚躍鳶飛摠一源


겨울에 다시 승지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노모의 봉양을 주청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비답(批答)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주-D001] 뛰노는 …… 한 이치인데 : 못에서 자연스럽게 뛰노는 고기와 하늘에 자유스럽게 나는 솔개란 뜻으로 자연의 대원리(大原理)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詩經 大雅》

서기 1578년 만력(萬曆) 8년 경진. 선생 39세

봄,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또다시 상소하여 노모의 봉양을 비니, 특명으로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해마다 노모의 봉양을 빌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이해 봄에 등대(登對)할 때 다시 청하였더니 상이 선생에게 왕래하여 귀성(歸省)하도록 하면서도 외직에 보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또다시 상소하여 애걸하였는데, 내용이 슬프고 간절하였다. 상이 특히 비답하기를,
“그대의 상소 내용을 보니 참으로 사정이 절박하구나. 내 마땅히 유념하겠노라.”
하였다. 이때에 상주 목사가 결원이 되자 상이 묻기를,
“상주에서 안동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였다. 이조에서 대답하기를,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류성룡이 늙은 어머니가 있는 관계로 여러 번 봉양하기를 요청하였으니, 이 고을을 맡게 하라.”
하였다. 선생이 사례하러 갔을 때에 인견하고서,
“할 수 없이 지방 고을을 맡게 해 달라는 요청에 따르게 되었노라.”
하고, 또 이르기를,
“그대를 상주 목사로 삼은 것은 이웃 고을 관리들이 본받도록 한 것이다.”
하고, 현실 문제들을 물으면서 거침없이 말하게 하였다.
○ 상주는 영남에서도 큰 고을이어서 경비가 많이 들어 1년 지출이 거의 만 섬[萬石] 정도나 되었다. 선생은 낭비를 줄이고 스스로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여 1년 지출이 몇 백 섬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아전이 아무리 성실하고 청백하여 이름이 드러나더라도 승진되는 길이 없으니, 아예 부정을 하여 가산을 늘리는 일은 그 이로움이 명예보다 더 실속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염치를 양성하는 법은 갖추지 않고 청렴결백하지 않다고 야단만 치니, 어찌 《주례(周禮)》에서 서민에게 염능 염선(廉能廉善)을 권장하는 본뜻이겠는가.”
하고서 계청(啓請)하여, 아전의 급료 제도를 중국 관리의 월급 규정과 같게 매월 1일마다 근면과 태만을 평가하여 거기에 따라 올려 주고 내려 주도록 하기로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대부인을 모시고 하외에서 임지인 상주로 갔다.
대부인이 평소에 가마를 타면 현기증이 있어 바야흐로 배편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오래도록 가물어 낙동강 물이 얕았었는데, 마침 출발할 때쯤 며칠을 계속 큰비가 내려 시냇물까지 모두 불어나자 곧 기악(妓樂)을 앞세우고 강에서 냇물을 따라 성 밖까지 당도하였는데, 구경하는 이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글을 지어 동몽사장(童蒙師長 향리(鄕里)에서 초학자(初學者)를 교육시키는 선생)들을 효유하였다.
선생이 정사를 행함에 예의와 사양으로 기본을 삼아 매월 1일과 15일마다 여러 학생들을 인솔하여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고, 물러 나와서는 명륜당에 모여 여러 학생들이 공부한 글을 강론하였다.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은 비유해 가면서 반복하여 깨우치되 능력에 따라 공부를 시켜 각각 조리가 있었다. 일찍이,
“선비들의 버릇이 게을러지는 것은 어릴 때 올바르게 기르지 못한 때문이며, 풍속이 무너지는 것은 향약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마을마다 동몽사장과 향약유사(鄕約有司)를 선출하여 글을 지어 효유하였는데, 대략 오륜을 철저하게 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성의를 다하여 간곡하게 이끌어 가면서 모든 처사를 옛 법대로 따라 하니, 1년 동안에 학정(學政)이 새로워져서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이임할 때에는 고을 사람이 비석을 세워서 선생의 공덕을 칭송하고 또 생사당(生祠堂)을 세우려 하였는데, 선생이 친한 이에게 글을 보내어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였다.

10월
아들 단(褍)이 태어났다.
[주-D001] 《주례(周禮)》 : 원문에 왕제(王制)로 되어 있으나 왕제는 《예기(禮記)》의 편명으로 이러한 내용이 없고 《주례(周禮)》를 잘못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례》 천관(天官) 소재(小宰)에 “첫째, 마음가짐이 선한가, 둘째는 직무에 능률적인가를 고찰한다.[一曰廉善 二曰廉能]” 하였다.

서기 1579년 만력(萬曆) 9년 신사. 선생 40세

1월
다시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상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어머님을 봉양하러 가기를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뵙고 가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고향에 다닐 때마다 반드시 민폐를 널리 조사해 가지고, 조정에 돌아오면 언제나 보고하였다.
과거에 수군을 열 사람씩 번을 세우되 한 사람으로 대장을 삼아 배 한 척을 통솔하게 하니, 그를 영선(領船)이라 했다. 그로 하여금 윤번제로 대오를 편성, 3일마다 교대하면서 각각 그 주장(主將)에게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주장된 사람이 요구하여 거두는 게 너무도 많으니, 그 밑에 있는 사람이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그러한 폐단을 조사하여 알고 계청하여 그 폐단을 고쳤다. 그후 선생이 안동에 갈 때, 수군 수백 명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죽 늘어서서 손을 모아 절을 하며 선생의 덕을 칭송하였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동료들과 10조항의 차자를 올렸다.
1. 실재의 덕을 닦아 천심(天心)에 보답할 것.
2. 대궐의 안과 밖을 엄격히 구분하여 궁중 출입을 엄숙히 할 것.
3. 정치의 대체를 가다듬어 규모를 수립할 것.
4. 공론을 중하게 여겨 조정의 기강을 정비할 것.
5. 명실을 밝혀서 인재를 등용할 것.
6. 공도는 넓히고, 요행을 찾는 문은 막을 것.
7. 염치를 배양하여 흐려진 풍속을 맑게 할 것.
8. 정치 체제와 법률 제도를 밝혀서 간사한 것을 막을 것.
9. 쌓인 폐단을 제거하여 국민 생활을 높일 것.
10. 학문을 숭상하여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을 것.
등이었다. 상이 특별한 비답을 내리고,

“이 소는 누가 지었는가?”
라고 묻자, 동료들이 선생이 지었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부제학이 아니면 이렇게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왕명을 받들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