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선생
서애선생 연보(41-52세)
부용대
2018. 8. 24. 12:37
만력(萬曆) 10년 임오. 선생 41세
봄,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때 선생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있다가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선생이 사간원에 있을 때, 세 가지 일을 건의하였다.
1. 조종조에서 시행한 규칙을 따라 실질적인 노력을 다할 것.
2. 대신들이 일을 관장하는 법을 되살려 조정의 체통을 세울 것.
3. 대간이 단독으로 아뢸 수 있는 길을 열어서 남의 의견에 겉따르는 폐단이 없게 할 것.
그 건의가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식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그후에 간신설(諫臣說)을 지었다.
7월
아들 진(袗)이 태어났다.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고, 겨울에 특명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승진되었다.
이때 왕(王)ㆍ황(黃) 두 명 나라 사신이 오자 특명으로 승지가 되었다.
선생이 바쁜 사무를 계획성 있게 처리하되 모두 도리에 맞게 하며 예의를 살피고 언어로 인도하는 일도 법도에 맞게 하니, 명 나라 사신이 크게 존경하고 감탄하였다. 말할 때마다 꼭 선생이라 부르고 작위를 부르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연회 때 주고받는 절차도 반드시 문의하여 시행하였다.
명 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에 상이 선생에게 금포(錦袍)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승진되었다.
왕명으로 《황화집(皇華集)》 서문을 지어 올렸다.
선생이 사간원에 있을 때, 세 가지 일을 건의하였다.
1. 조종조에서 시행한 규칙을 따라 실질적인 노력을 다할 것.
2. 대신들이 일을 관장하는 법을 되살려 조정의 체통을 세울 것.
3. 대간이 단독으로 아뢸 수 있는 길을 열어서 남의 의견에 겉따르는 폐단이 없게 할 것.
그 건의가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식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그후에 간신설(諫臣說)을 지었다.
7월
아들 진(袗)이 태어났다.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고, 겨울에 특명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승진되었다.
이때 왕(王)ㆍ황(黃) 두 명 나라 사신이 오자 특명으로 승지가 되었다.
선생이 바쁜 사무를 계획성 있게 처리하되 모두 도리에 맞게 하며 예의를 살피고 언어로 인도하는 일도 법도에 맞게 하니, 명 나라 사신이 크게 존경하고 감탄하였다. 말할 때마다 꼭 선생이라 부르고 작위를 부르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연회 때 주고받는 절차도 반드시 문의하여 시행하였다.
명 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에 상이 선생에게 금포(錦袍)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승진되었다.
왕명으로 《황화집(皇華集)》 서문을 지어 올렸다.
만력(萬曆) 11년 계미. 선생 42세
1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상이 호피(虎皮) 방석을 특별히 하사하여 늙은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라고 하였다. 선생은 상소하여 감사함을 아뢰었다.
회재 선생(晦齋先生)의 《구경연의(九經衍義)》의 발문을 지었다.
2월
북녘 오랑캐 족속인 이탕합(尼湯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 봉사(封事)를 올렸다.
왕명으로 국경 방위책 5조항을 올렸다.
1. 화의 근원을 막을 것.
2. 싸우고 지키는 규정을 정할 것.
3. 오랑캐의 정세를 살필 것.
4. 군대에 보급품을 충분히 줄 것.
5.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를 닦을 것.
등이었다.
이때 조정의 공론이,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상이 호피(虎皮) 방석을 특별히 하사하여 늙은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라고 하였다. 선생은 상소하여 감사함을 아뢰었다.
회재 선생(晦齋先生)의 《구경연의(九經衍義)》의 발문을 지었다.
2월
북녘 오랑캐 족속인 이탕합(尼湯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 봉사(封事)를 올렸다.
왕명으로 국경 방위책 5조항을 올렸다.
1. 화의 근원을 막을 것.
2. 싸우고 지키는 규정을 정할 것.
3. 오랑캐의 정세를 살필 것.
4. 군대에 보급품을 충분히 줄 것.
5.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를 닦을 것.
등이었다.
이때 조정의 공론이,
“비밀리에 군대를 오랑캐 지역에 투입시켜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자.”
하였으나,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랑캐들이 도리를 어긴 것은 진실로 잘못이지마는, 당당한 우리 조정이 그 죄상을 성토하지 못하고 비밀리에 군대를 투입시켜 엄습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만물을 사랑하는 왕자(王者)의 도리이겠는가.”
이에 그 의논은 드디어 잠잠해지고 말았다.
5월
휴가를 얻어 어머니를 가 뵈었다.
동서의 당론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선생은 이미 크게 근심하여 뜻이 맞는 여러 동지들과 힘써 평화롭게 진정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는 붕당들이 더욱 심해져서 서로들 편들어 가며 후원을 하였다.
선생은 조정에 있기가 싫어졌고 대부인도 병중이어서 뵈러 온 김에 물러나 시골에 머물렀다.
7월
특명으로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환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종실인 경안령(慶安令) 요(瑤)가 청대하여 말하기를,
5월
휴가를 얻어 어머니를 가 뵈었다.
동서의 당론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선생은 이미 크게 근심하여 뜻이 맞는 여러 동지들과 힘써 평화롭게 진정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는 붕당들이 더욱 심해져서 서로들 편들어 가며 후원을 하였다.
선생은 조정에 있기가 싫어졌고 대부인도 병중이어서 뵈러 온 김에 물러나 시골에 머물렀다.
7월
특명으로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환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종실인 경안령(慶安令) 요(瑤)가 청대하여 말하기를,
“유성룡ㆍ김효원(金孝元)ㆍ이발(李潑)ㆍ김응남(金應南) 등 네 사람은 외직으로 내보내서 조정 의논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이때에 상이 특별히 선생을 함경 감사로 제수하였다. 선생은 이때 시골에 있었는데, 대부인의 병환이 심한 관계로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우의정 정지연(鄭芝衍)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우의정 정지연(鄭芝衍)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경연에 오래 모시던 유신(儒臣)으로 변방의 책임을 특별히 맡기는 일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고,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도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난날 경안령 요(瑤)가 문득 유성룡 등을 지적하여 조정의 권력을 멋대로 한다는 구실로 멀리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유성룡 등은 모두 청렴하다는 높은 명망으로 사림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국가에 귀중한 신하입니다. 요(瑤)의 말이 한 번 나오자 선비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하였다.
9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0월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자 동 10월에 조정에 나가 은혜에 사례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9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0월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자 동 10월에 조정에 나가 은혜에 사례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천지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도리이니, 동서남북 어디든지 오직 명령대로 따라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죽으나 사나 그대로 하는 것은 신하된 절개입니다.
신은, 늙고 병들어 다 죽게 된 어머니가 계셔서, 전적으로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옵고, 자리를 비운 적이 너무도 많습니다. 지난번 함경도 관찰사를 임명하여 주신 일도 지극히 아껴 주시고 거두어 주시는 은혜에서 나온 만큼, 신으로서는 마땅히 지체 없이 부임하여 물방울이나 티끌만큼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였기 때문에 만류하시는 옷소매를 뿌리치고 문밖을 나서는 일은 신이 정말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상소하여 체임시켜 주시는 은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태평하면 벼슬하여 작록을 받고 사세가 어려우면 편의를 택한다는 것은 이른바 신하의 도리가 땅을 쓴 듯이 없다는 뜻입니다. 뜻밖에도 경상도 관찰사의 책임을 맡는 큰 은혜를 다시 내려 주시니, 어머니 곁에 조금 가까워져서 신의 한 몸에는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다만 전번에 함경도에는 부임하지 않고, 이번에 경상도에는 부임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멀고 어려운 것은 사양하여 버리면서도, 쉽고 가까운 것은 택하여 도모한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신은 비록 매우 어리석어서 그랬다손 치더라도, 공의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지극한 간청을 살펴서 속히 새로 내리신 직첩을 거두어, 신의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은 농촌에서 봉양하도록 하여 주시고, 또 여가 있는 대로 옛날에 배웠던 학문을 다시 복습하면서 과오를 메워 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하시면 천지 부모처럼 시종 보전해 주신 은혜가 만만 배나 될 것입니다.”
신은, 늙고 병들어 다 죽게 된 어머니가 계셔서, 전적으로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옵고, 자리를 비운 적이 너무도 많습니다. 지난번 함경도 관찰사를 임명하여 주신 일도 지극히 아껴 주시고 거두어 주시는 은혜에서 나온 만큼, 신으로서는 마땅히 지체 없이 부임하여 물방울이나 티끌만큼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였기 때문에 만류하시는 옷소매를 뿌리치고 문밖을 나서는 일은 신이 정말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상소하여 체임시켜 주시는 은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태평하면 벼슬하여 작록을 받고 사세가 어려우면 편의를 택한다는 것은 이른바 신하의 도리가 땅을 쓴 듯이 없다는 뜻입니다. 뜻밖에도 경상도 관찰사의 책임을 맡는 큰 은혜를 다시 내려 주시니, 어머니 곁에 조금 가까워져서 신의 한 몸에는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다만 전번에 함경도에는 부임하지 않고, 이번에 경상도에는 부임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멀고 어려운 것은 사양하여 버리면서도, 쉽고 가까운 것은 택하여 도모한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신은 비록 매우 어리석어서 그랬다손 치더라도, 공의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지극한 간청을 살펴서 속히 새로 내리신 직첩을 거두어, 신의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은 농촌에서 봉양하도록 하여 주시고, 또 여가 있는 대로 옛날에 배웠던 학문을 다시 복습하면서 과오를 메워 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하시면 천지 부모처럼 시종 보전해 주신 은혜가 만만 배나 될 것입니다.”
상이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이 상소의 내용을 보니 남의 말을 듣고 속으로 불안을 느낀 데 불과하다. 유성룡은 참으로 훌륭한 학자로서, 조정 신하들 가운데서도 아주 뛰어난 인물이다. 다만 늙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번번이 부를 수가 없을 뿐이었다. 지금 다시 돌려 유시하노니, 늙은 어머니가 있고 집도 본도에 있기 때문에 지금 그대를 관찰사로 삼았으니, 사양하지 말고 부임하도록 하라.”
선생은 하는 수 없이 조정에 나가서 은혜에 사례하고, 영의정 박순(朴淳)에게 하직 인사차 찾아갔다. 박순이 현실 문제에 대해 말하기를,
“허미숙(許美叔) 등이 죄를 당한 것은 운명이지, 사람의 잘못이 아니네.”
하자, 선생은 말하기를,
“이필(李泌)의 말이, ‘임금과 재상은 운명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대감은 운명을 만드는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 운명에다 맡기고 사람 잘못은 따지지 않습니까.”
하였다. 박순이 한참 있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일찍이 간쟁한 일 때문에 언관을 처벌한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허봉(許篈) 등 세 사람이 죄는 가벼운데 처벌은 무거워 온 나라가 불안을 느끼고 있으니, 대감께서는 해결책을 잘 생각하십시오.”
하니, 박순이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숙헌(叔獻 이이(李珥))과 밤낮으로 의논하는 게 바로 그 문제요.”
하였다.
영남은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일이 많고 복잡하였다. 선생이 부임하고서는 좌우로 응수하여 판결을 물이 흐르듯 하였다.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아랫사람을 신의 있게 대하며 잔민들을 살리고 폐단을 혁신하였다. 마음을 다해 정치한 지 몇 달이 안 가서 기강이 바로잡히고 정사와 교화가 널리 퍼져 관리들과 백성들이 서로 조심하여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영남은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일이 많고 복잡하였다. 선생이 부임하고서는 좌우로 응수하여 판결을 물이 흐르듯 하였다.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아랫사람을 신의 있게 대하며 잔민들을 살리고 폐단을 혁신하였다. 마음을 다해 정치한 지 몇 달이 안 가서 기강이 바로잡히고 정사와 교화가 널리 퍼져 관리들과 백성들이 서로 조심하여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 [주-D001] 허미숙(許美叔) …… 것 : 허봉이 선조 16년(1583) 9월,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 등과 간쟁(諫爭)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귀양 간 일이다.
- [주-D002] 이필(李泌)의 말 : 이필은 당 나라 덕종(德宗) 때 사람이다. 덕종이 건중(建中 덕종의 연호) 때 난리는 천명(天命)이라고 말하자, 이필이 대답하기를, “천명은 타인이 모두 말할 수 있어도 군상(君上)만은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개 군상은 조명(造命)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唐書 卷130 李泌列傳》
- 만력(萬曆) 12년 갑신. 선생 43세 여름에 가뭄으로 인하여 장계를 올려 각 고을의 죄수들을 처결하여 석방하자고 주청하였다.
순시차 진주에 가서 집에 있던 사축(司畜) 최영경(崔永慶)을 방문하였다.
최영경은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으로, 서울에서 진주로 이사 와서 대숲 속에 집을 짓고 학 한 마리와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벼슬이 높은 이가 문 앞에 찾아와서 만나 보려 하더라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사람은 문득 거절하고 집 안에 들이지 않았다. 선생이 그전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최공이 흔연히 나와 맞이하여 술대접을 하고 친절하게 환담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세상일을 말하였는데 그 의논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7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이에 앞서 영의정 소재(蘇齋) 노수신(盧守臣)이 상주에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상이 묻기를,“경상 감사의 정치하는 것이 어떠하오.”하자 대답하기를,“공명하고 어진 덕을 갖추어서 도 전체에서 정치를 잘한다고 칭송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아, 그러하오. 그 사람이 재능도 있고 학식도 있어서 내가 오래전부터 잘할 줄 알고 있었소.”하였다. 이때 와서 이 명이 내려진 것이다.
네 번이나 체임을 사양하였다.
8월
다시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상이 따뜻하게 타이르며 윤허하지 않았다. 강관 중에 제일가는 인물이란 말이 있었다.
왕명으로 《문산집(文山集)》 서문을 지어 올렸다.
승진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대체로 작위를 주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최고의 작위는 덕망, 그 다음은 재능, 그 다음은 공로, 그 다음은 근속 연한에 의하여 주는 것이옵니다. 만약 이러한 몇 가지에 해당되지도 않는데 까닭 없이 작위가 주어지는 것은 정치 체제에서도 잘못 주는 것이고, 개인 신상에 있어서도 상서롭지 못합니다.
신은 이미 재능과 덕망으로 선택된 것도 아니고 또한 근속한 연한과 공로가 쌓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순서와 등급을 뛰어넘어 우뚝 재상의 반열에 끼었사오니 정치 체제나 사정 형편으로 보더라도 될 법이나 한 일이옵니까.
신은 영남 변두리의 미천한 출신으로서, 본디 어리석은 주제에 평소 학문도 제대로 통하지 못하여 쓰여질 만한 재능이 못 되옵고, 게다가 체질이 허약하여 질병마저 곁들였으며 지식이 어둡고 천박하여 일에 부딪치면 어쩔 줄을 모르니, 이 어찌 사무를 담당할 만한 그릇이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러 번 분에 넘치게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나서려니 재력이 모자라고, 물러나 분수를 지키고 있으려니 두터운 은총만 더해지니, 신의 처지가 매우 곤란하여 마음도 괴롭기 그지없사옵니다.
옛 군자들이 한 가자(加資)와 반 등급에 대해서도 간혹 평생토록 극력 사양하여 한사코 받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음에 반드시 크게 불안한 점이 있어서 함부로 나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신의 절박하고 안타까운 정상을 굽어 살피어 내려 주신 벼슬을 취소하도록 특별히 허락하여 주신다면 신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자 다행이겠습니다.”상이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그대의 글을 보니, 간담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발탁한 것은 사적으로 경을 총애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이다.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법은 참으로 한 가지 방법만은 아니었다. 옛사람 가운데에 농어촌 출신으로 등용되어 조정에 높은 지위에 앉은 이가 있었는데, 그는 본디부터 그러한 위치에 있은 듯 여기고 물러가겠노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과연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리에 밝지 못하여, 이토록 수치심도 없이 벼슬만 탐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옛 임금이 그 신하에 대하여 신하로 여긴 이도 있고, 벗으로 여긴 이도 있으며, 또한 스승으로 여긴 이도 있었다. 그대는 10년 동안 경연에 있으면서 한결같은 덕으로 아무런 하자도 없었으며 의리상 임금과 신하라고는 하지만 정의는 친구와 다름이 없다.
학문으로 말하면, 장구나 따지는 천박한 선비가 아니며, 재능으로 말하면 충분히 큰일을 감당할 만하도다. 그대를 나만큼 아는 이가 없으니 종백(宗伯)의 장에는 그대만이 적격자이다. 부디 직무에 충실하고 다시는 사양하지 말라. 나는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노라.”또다시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상이 자상하게 비답하면서도 윤허하지 않고, 이조에 명하여 겸암공을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제수시켜 늙은 어머니를 편히 봉양하도록 하여 선생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태학관 여러 학생에게 공문을 돌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대체로 사람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타고났다. 그 성품은 인의예지의 이치를 갖추었고, 그 도리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벗들과의 윤리가 있다.
성인이 교훈을 내려 본성을 되찾도록 가르치고 지도한 것은 비록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개는 다섯 가지 윤리 가운데서 서로서로 친하고 공경하게 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맹자》에, ‘인의 실재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고, 의의 실재는 형을 따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아, 천하의 이치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이겠으며, 스승이 가르치고 제자가 배우는 것도 이것을 버려두고 별다른 것을 구하는 것은 있지 않았다. 《소학(小學)》 같은 책은 주자(朱子)가 성현들의 격언과 고금의 선행을 수집하여, 어린이들에게 덕성을 배양시켜 주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거기서 시종 강조한 것은 오로지 스승을 높이 받들고, 벗과 친하며,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들을 공경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예절을 지켜서 성실하고 겸손하여 사람들의 잘못과 조정의 득실은 일체 말하지 않는 데에 있을 뿐이다. 어찌 어른들을 업신여기고 부형들을 헐뜯으며 말을 다투어 남에게 이기려는 것을 도로 삼아 가르쳤겠는가. 근래에 중국의 《향교예집서(鄕校禮輯書)》를 보았는데, 동자례(童子禮)를 발췌하여 한 권을 만들어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료에 편리하도록 하였고, 또 태학관 여러 학생들에게는 주자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여 수시로 관례(冠禮)ㆍ혼례(婚禮)ㆍ상례(喪禮)ㆍ제례(祭禮)와 오르고 내림과 사양하고 겸손하는 예절을 익히게 하였다.
모든 학생들이 진실로 익숙하도록 강론하고 철저하게 지키되 너무 급박하게 하려고도 말며 그렇다고 너무 태만하지도 말아 차차 젖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려고 하여도 그만둘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 받들고 벗들과 친하는 마음이 권면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저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또 각처에 향약을 반포하여 효제(孝悌)와 예양(禮讓)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바로잡는 기본으로 삼았다.
사면이 있은 후에 상소하여 여러 죄인들을 풀어 주자고 주청하였다.
허봉 등이 북쪽 변경으로 유배되어 오래도록 풀려나지 않았다. 그래서 상소하여 논계한 것이다.- [주-D001] 향약 : 권선징악을 위주로 한 향촌의 자치 규약으로서, 본디 중국 송(宋) 나라 때의 남전 여씨(藍田呂氏 여대균(呂大鈞))의 향약을 본뜬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종 14년에 실시되었다.
- [주-D001] 향약 : 권선징악을 위주로 한 향촌의 자치 규약으로서, 본디 중국 송(宋) 나라 때의 남전 여씨(藍田呂氏 여대균(呂大鈞))의 향약을 본뜬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종 14년에 실시되었다.
만력(萬曆) 13년 을유. 선생 44세
3월
왕명으로 《정충록(精忠錄)》 발문을 지어 올렸다.
4월
아들 위(褘)가 죽었다.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의주 목사 서익(徐益)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왕명으로 《정충록(精忠錄)》 발문을 지어 올렸다.
4월
아들 위(褘)가 죽었다.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의주 목사 서익(徐益)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정여립(鄭汝立)이 이이(李珥)에게 보낸 글에 ‘크게 간악한 자가 아직 있다.’라는 말이 있으니, 크게 간악한 자란 유성룡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였다.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유성룡은 군자다. 당대의 대현(大賢)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면 저절로 심복(心服)되는데, 어찌 그만한 학식과 기상을 가진 사람이 큰 간악한 자가 될 이치가 있겠는가. 어느 간담 큰 자가 감히 그러한 말을 하였는가?”
하였다.
선생은 이때에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청하면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다섯 가지를 피력하였다.
선생은 이때에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청하면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다섯 가지를 피력하였다.
“전하께선 신을 아주 후하게 총애하여 주셨는데도 신은 한 가지도 전하의 교화에 보탬이 없었으니, 이는 마땅히 물러나야 할 한 가지입니다. 신이 글을 읽어서 약간의 의리는 아는데, 늘그막에 이런 지목을 받고도 스스로 물러날 줄 모르면 염치가 없는 것이오니, 이는 마땅히 물러나야 할 두 가지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사적인 견해를 가지고 좌니 우니 하기 때문에, 세상에 올바른 도리와 사람의 참다운 양심이 날마다 심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과 같이 기반이 약한 자는 발 한번 들거나 말 한번 하거나 하면 문득 흉이 되니, 이는 마땅히 물러나야 할 세 가지입니다. 신의 늙은 어머니가 오래된 병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신이 천 리 밖에 떠나 있어 자칫 절후가 바뀌어 숙수(菽水)의 봉양을 한번 잃게 되면 다시는 뒤미쳐 할 수 없으니, 이는 마땅히 물러나야 할 네 가지입니다. 신은 타고난 기품이 쇠약한 데다 맡은 사무가 어지러워 사소한 일에도 정신까지 흐려져 버렸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일 처리에 어떻게 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자유스러운 몸으로 산골에 돌아가서 옛 학문이나 연마하여 늘그막에 보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니, 이는 마땅히 물러나야 할 다섯 가지입니다.
감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용납해 주시어 벼슬을 내치소서.”
감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용납해 주시어 벼슬을 내치소서.”
그러나 윤허하지 않았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조정에 돌아와서 왕명으로 포은 정 선생(圃隱鄭先生)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연보와 《문집》의 발문도 지었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조정에 돌아와서 왕명으로 포은 정 선생(圃隱鄭先生)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연보와 《문집》의 발문도 지었다.
- [주-D001] 비망기(備忘記) :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
만력(萬曆) 14년 병술. 선생 45세
부마(駙馬)를 간택하는 일을 논계하였다.
이때 부마를 간택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동성이라도 본관이 다르면 구애받지 말라고 하였으니, 대개 속셈이 있어서였다. 선생은 논계하기를,
이때 부마를 간택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동성이라도 본관이 다르면 구애받지 말라고 하였으니, 대개 속셈이 있어서였다. 선생은 논계하기를,
“예에 동성에게 장가들지 않는 것은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총(劉聰)이 유은(劉殷)의 두 딸을 비(妃)로 맞이하였는데, 소종래가 아주 다르지만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는 그것을 ‘개와 염소가 뒤섞였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당(唐)ㆍ송(宋) 이후로 공주에게 장가든 이는 모두 이성이었습니다. 오직 당 나라 소종(昭宗)만이 이무정(李茂貞)의 아들로 부마를 삼았는데, 이것은 권신(權臣)들의 협박에 의한 것이니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여, 그 일이 결국 중지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상이 왕자 의안군(義安君 선조대왕의 셋째 아들)을 복성군(福城君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이복형(異腹兄))의 후계자로 명하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회계(回啓)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상이 왕자 의안군(義安君 선조대왕의 셋째 아들)을 복성군(福城君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이복형(異腹兄))의 후계자로 명하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회계(回啓)하였다.
“예에, ‘후계자는 아들 항렬에서 취하고 손자 항렬에서 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성군은 의안군에게 종조(從祖)입니다. 제후(諸侯)의 서자(庶子)가 종(宗)이 되는데, 다음날 사당을 세우게 되면 할아버지는 있고 아버지는 없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종실 중에서 아들 항렬을 취하여 후계자를 삼아야지, 왕자로써 삼는 것은 부당합니다.”
처음에 선생이 계사를 초안할 때, 참판 황정욱(黃廷彧)이 선생에게 보내온 글에,
“의안군이 복성군의 후계가 되는 것은 의리에 무방하다.”
하였는데, 선생은 예문(禮文)을 인용하여 답하였다. 이튿날 경연의 낮 강독에서 황정욱이 아뢰기를,
“의안군이 복성군의 후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은 놀란 표정으로 이르기를,
“예조의 공론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황정욱은 대답하기를,
“그것은 신의 의견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상이 아무 말이 없다가 물러난 뒤에, 그 일이 드디어 이룩되었다.
3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서 상소하여 직명(職名)을 취소해 주기를 청하였다.
남계서당(南溪書堂)이 완성되었다.
서당은 군위 선영의 남쪽에 있다. 전에 관찰공이 재실을 지으려다 짓지 못하였는데, 이때 와서 비로소 완성하였다. 당(堂)은 상로당(霜露堂), 재는 영모재(永慕齋)라 하여 재실로 삼고, 동쪽엔 완심재(玩心齋)ㆍ연어헌(鳶魚軒)을 지어 공부하는 여러 학생들을 거처하게 하고, 북쪽에는 삼정재(三靜齋)를 만들어, 승려를 데려다가 뒤에서 지키게 하였다. 상로당 앞에는 애련당(愛蓮堂), 연어헌 밖에는 양어지(養魚池)가 있으며, 서쪽 산기슭 밑에는 초은대(招隱臺)가 있고, 동쪽 바위에는 영귀대(咏歸臺)가 있다. 영귀대 아래 흐르는 큰 냇물은 탄서(歎逝)라 하고, 연어헌 동쪽의 작은 냇물은 의공(倚筇)이라 하였다. 종합하여 ‘남계정사(南溪精舍)’라는 현판을 달았다. 남계 12영(詠)과 여러 작품이 있다.
남계에서 인동(仁同)으로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이때 겸암공이 대부인을 받들고 임지인 인동에 있었다. 선생은 하외에서 인동까지는 거리가 조금 먼 관계로 가까운 남계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시종들을 시켜서 문안을 드리게 하고, 자신은 10일마다 가 뵈었다. 이때 큰길로 다니지 않았으니, 아무도 재상의 행차인 줄을 몰랐다.
선생이 남계정사에서 《주역(周易)》을 읽을 때, 검소한 생활로 고생을 하면서 학문에만 열심하였다. 어떤 사람이 산 물고기[生魚]를 갖다 주었는데, 선생이,
3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와서 상소하여 직명(職名)을 취소해 주기를 청하였다.
남계서당(南溪書堂)이 완성되었다.
서당은 군위 선영의 남쪽에 있다. 전에 관찰공이 재실을 지으려다 짓지 못하였는데, 이때 와서 비로소 완성하였다. 당(堂)은 상로당(霜露堂), 재는 영모재(永慕齋)라 하여 재실로 삼고, 동쪽엔 완심재(玩心齋)ㆍ연어헌(鳶魚軒)을 지어 공부하는 여러 학생들을 거처하게 하고, 북쪽에는 삼정재(三靜齋)를 만들어, 승려를 데려다가 뒤에서 지키게 하였다. 상로당 앞에는 애련당(愛蓮堂), 연어헌 밖에는 양어지(養魚池)가 있으며, 서쪽 산기슭 밑에는 초은대(招隱臺)가 있고, 동쪽 바위에는 영귀대(咏歸臺)가 있다. 영귀대 아래 흐르는 큰 냇물은 탄서(歎逝)라 하고, 연어헌 동쪽의 작은 냇물은 의공(倚筇)이라 하였다. 종합하여 ‘남계정사(南溪精舍)’라는 현판을 달았다. 남계 12영(詠)과 여러 작품이 있다.
남계에서 인동(仁同)으로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이때 겸암공이 대부인을 받들고 임지인 인동에 있었다. 선생은 하외에서 인동까지는 거리가 조금 먼 관계로 가까운 남계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시종들을 시켜서 문안을 드리게 하고, 자신은 10일마다 가 뵈었다. 이때 큰길로 다니지 않았으니, 아무도 재상의 행차인 줄을 몰랐다.
선생이 남계정사에서 《주역(周易)》을 읽을 때, 검소한 생활로 고생을 하면서 학문에만 열심하였다. 어떤 사람이 산 물고기[生魚]를 갖다 주었는데, 선생이,
“듣자니 그 사람이 부모 봉양하기도 넉넉하지 않다는데 나에게까지 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받지 않았다.
옥연서당(玉淵書堂)이 완성되었다.
○ 선생이 원지정사(遠志精舍)를 지은 뒤에 오히려 마을과 너무 가까운 것을 한탄하여 북담(北潭)에다 자그만한 집을 지어 거기에서 늙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마침 탄홍(誕弘)이란 승려가 그 일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하고 곡식과 비단[帛]을 투자하였다. 그런 뒤 10년이 지나서 완성되었는데, 이름은 ‘옥연’이라 하였다. 정사잡영(精舍雜詠)과 기문이 있다.
길야은(吉冶隱 길재(吉再))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의 후면 기문을 지었다. 또 오산서원(吳山書院) 봉안문(奉安文)이 있다.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구백담(具栢潭)의 부고를 받고 곡하였다. 제문과 만사(挽詞)가 있다.
옥연서당(玉淵書堂)이 완성되었다.
○ 선생이 원지정사(遠志精舍)를 지은 뒤에 오히려 마을과 너무 가까운 것을 한탄하여 북담(北潭)에다 자그만한 집을 지어 거기에서 늙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마침 탄홍(誕弘)이란 승려가 그 일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하고 곡식과 비단[帛]을 투자하였다. 그런 뒤 10년이 지나서 완성되었는데, 이름은 ‘옥연’이라 하였다. 정사잡영(精舍雜詠)과 기문이 있다.
길야은(吉冶隱 길재(吉再))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의 후면 기문을 지었다. 또 오산서원(吳山書院) 봉안문(奉安文)이 있다.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구백담(具栢潭)의 부고를 받고 곡하였다. 제문과 만사(挽詞)가 있다.
만력(萬曆) 15년 정해. 선생 46세
3월
부름을 받고 가다가, 도중에서 사양하고 돌아왔다. 또다시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서재에서 《주역》을 읽다[齋居讀易]’라는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초라한 서재에서 주역을 읽으며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 竆簷讀易歎吾迷
새벽같이 일어나 공부하노라면 어느덧 해가 지네 / 晨起硏劘至日西
복희와 문왕 소식이 멀다 말라 / 莫道羲文消息遠
창밖에 봄의 새소리 들려오네 / 隔窓春鳥數聲啼
퇴계 선생의 문집을 편차(編次)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이오봉(李五峯 이호민(李好閔))에게 준 글은 다음과 같았다.
부름을 받고 가다가, 도중에서 사양하고 돌아왔다. 또다시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서재에서 《주역》을 읽다[齋居讀易]’라는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초라한 서재에서 주역을 읽으며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 竆簷讀易歎吾迷
새벽같이 일어나 공부하노라면 어느덧 해가 지네 / 晨起硏劘至日西
복희와 문왕 소식이 멀다 말라 / 莫道羲文消息遠
창밖에 봄의 새소리 들려오네 / 隔窓春鳥數聲啼
퇴계 선생의 문집을 편차(編次)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이오봉(李五峯 이호민(李好閔))에게 준 글은 다음과 같았다.
“선생 문집을 김사순(金士純 김성일(金誠一))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서 편차를 하고 다시 상의하여 정정하려 하였더니, 뜻밖에 선성(宣城) 사람들이 갑자기 초본(草本)을 가지고 간행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선생께서 일찍이 직접 삭제한 부분도 실렸으니, 항상 펴 볼 때마다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만력(萬曆) 16년 무자. 선생 47세
동경연(同經筵)으로 부름을 받고 가다가 도중에서 사양하고 돌아왔다.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연좌루의 가을 심정[燕坐樓秋思]’이란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천고에 주역 이치를 / 千古羲文學
삼 년 동안 앉아서 연구했다네 / 三年燕坐心
마음속에 푸른 벽이 우뚝한데 / 意中蒼壁立
음미하는 옆엔 푸른 강물이 어둠에 잠기네 / 吟外暮江深
10월
형조판서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예문관제학을 겸하였다.
선생이 부름을 받고 부임하였다. 상이 인견하고, 학문을 토론하다가 왕양명의 치양지(致良知)와 심즉리(心卽理)의 학설을 질문하면서 크게 잘못되지 않은 것같이 여겼다. 선생이 아주 상세하게 풀이하여 설명하니, 상이 지루한 것도 잊고 열심히 듣고서는 이르기를,
여러 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연좌루의 가을 심정[燕坐樓秋思]’이란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천고에 주역 이치를 / 千古羲文學
삼 년 동안 앉아서 연구했다네 / 三年燕坐心
마음속에 푸른 벽이 우뚝한데 / 意中蒼壁立
음미하는 옆엔 푸른 강물이 어둠에 잠기네 / 吟外暮江深
10월
형조판서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예문관제학을 겸하였다.
선생이 부름을 받고 부임하였다. 상이 인견하고, 학문을 토론하다가 왕양명의 치양지(致良知)와 심즉리(心卽理)의 학설을 질문하면서 크게 잘못되지 않은 것같이 여겼다. 선생이 아주 상세하게 풀이하여 설명하니, 상이 지루한 것도 잊고 열심히 듣고서는 이르기를,
“학문은 마땅히 정자(程子)나 주자(朱子)를 종사(宗師)로 삼아야지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대가 오래도록 산림 속에서 옛사람의 글을 많이 읽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대의 의논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러하도다.”
하였다. 그후 선생이 경연에서도 왕양명의 마음가짐의 그릇됨과 학문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설명하였다. 대체로 임금의 학문이 고명하여 장구와 훈고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간혹 말이 지나친 곳이 있었다. 선생은 그러한 점을 근심하여 잇따라 아주 절실하게 권면하고 경계하였다.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게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게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은 듣건대,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으니, 작은 것을 억지로 크게 할 수 없으며 짧은 것을 늘려서 길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위치를 바꾼다면 버린 재목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임무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현명하고, 신하는 능력대로 직책을 맡는 것이 충성입니다. 지금 신의 능력으로 저의 책임을 생각해 볼 때, 불가능하다는 것은 굳이 지혜 있는 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면 탈이 나는 졸렬한 주제에 큰 목수의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중히 생각하고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여 하루 빨리 적격자에게 맡겨, 중한 임무가 오래도록 공백이 없게 하신다면 조정의 다행이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중히 생각하고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여 하루 빨리 적격자에게 맡겨, 중한 임무가 오래도록 공백이 없게 하신다면 조정의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다시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17년 기축. 선생 48세
봄,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겸직은 전과 같았다.
체임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겸직은 전과 같았다.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6월
왕명으로 《효경대의(孝經大義)》의 발문을 지어 올렸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7월
부인 이씨가 죽었다.
이때 선생이 고향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다 광진(廣津)에 이르러 부인의 부고를 받았다.
9월
안동으로 가는 부인의 상여를 전송하였다.
이때 일본 사신이 도성 아래에 와 있어서 통신사를 물색하느라고 조정에 일이 많아 휴가를 얻지 못하고 신천(新川)까지 상여를 전송하고 돌아왔다.
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0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옥사가 일어났다.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고향에 있으면서 여러 번 부름을 받고도 부임하지 않자, 백유양(白惟讓)이 조정에 나오도록 권하라는 뜻으로, 정여립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와서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 글이 조정에 입수되었고 백유양의 진술에서 선생의 성명이 나왔다. 이 때문에 선생은 체임시켜 주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소하여 스스로의 죄상을 말하였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겸직은 전과 같았다.
체임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겸직은 전과 같았다.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6월
왕명으로 《효경대의(孝經大義)》의 발문을 지어 올렸다.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7월
부인 이씨가 죽었다.
이때 선생이 고향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다 광진(廣津)에 이르러 부인의 부고를 받았다.
9월
안동으로 가는 부인의 상여를 전송하였다.
이때 일본 사신이 도성 아래에 와 있어서 통신사를 물색하느라고 조정에 일이 많아 휴가를 얻지 못하고 신천(新川)까지 상여를 전송하고 돌아왔다.
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0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옥사가 일어났다. 여러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고향에 있으면서 여러 번 부름을 받고도 부임하지 않자, 백유양(白惟讓)이 조정에 나오도록 권하라는 뜻으로, 정여립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와서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그 글이 조정에 입수되었고 백유양의 진술에서 선생의 성명이 나왔다. 이 때문에 선생은 체임시켜 주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소하여 스스로의 죄상을 말하였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역적의 변고가 양반층에서 나오니, 대체로 평소에 그와 조금이라도 안면이나 한 번 편지나 말 한마디라도 서로 허여한 사람은 모두들 가슴 아프게 부끄러워하며 불안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형상도 없고 근거 없는 말로 문자 사이에 연루가 되어 일시의 화를 입는 것은 말할 바도 아니나 천추만대까지 그러한 치욕이 여전히 남을 것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합니다.
신이 10여 년 전에 정여립이란 자가 제법 글을 읽고 학문을 열심히 한다고 들었는데, 그후에는 그 사람이 스스로 잘난 체하여 경망스럽게도 자신의 견해가 옛날 사람보다 더 낫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신은 벌써부터 그의 사람됨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후에 명망이 차차 높아지니까 모두들 그를 요직에 발탁하려 하였는데 이경중(李敬中)만이 이조 전랑으로 있을 때 적극적으로 배척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외부의 의논이 ‘이경중이 훌륭한 사람을 질투한다.’고 떠들어 결국 이경중을 이조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막힌 길이 트이게 되어 곧 서로들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오히려 전일의 견해로 그의 사람됨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 신의 동료들도 이경중의 말을 들은 이는 싫어하는 이가 많았으니, 정여립이 신들에게 감정을 품고 반드시 기회를 보아 화를 전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자가 호남에 있을 때 서울 사람에게 보낸 글에서, 신을 지적하여 ‘큰 간악[巨奸]’이라 하였는데, 서익(徐益)의 상소가 나옴으로써 그 일이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다행하게도 전하께서 밝게 보살펴 주셔서 신을 죄에서 면해 주시고 신도 그때부터 조정에 있는 것이 불안하여서 농촌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은 알기 어렵다는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기왕의 일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처음 그 역적이 문자의 겉만 발라 꾸며 괴이한 행동으로 온 세상을 현혹하니, 잇따라 모든 선비들이 그의 농간에 말려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러한 기미를 미리 엿본 이가 혹 있었지만 반복(反覆) 부정(不靖)할까 근심하였을 뿐 어떻게 이처럼 극악무도한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습니까. 이제 보면 정여립의 간악한 죄상을 미리 안 사람은 이경중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신이 그 역적에 대하여 전에는 싫은 마음이 있었고 후에는 그의 기미를 엿보면서도 일찍이 그의 간악한 진상을 한마디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국가를 저버린 죄는 피할 수 없으니, 쫓겨나서 귀양 가게 되더라도 실로 달게 받겠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신의 심정을 가엾게 여겨 농촌으로 돌아가게 하여 문을 닫고 죄과를 반성하여 부끄러워서 죽게 해 주신다면 신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10여 년 전에 정여립이란 자가 제법 글을 읽고 학문을 열심히 한다고 들었는데, 그후에는 그 사람이 스스로 잘난 체하여 경망스럽게도 자신의 견해가 옛날 사람보다 더 낫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신은 벌써부터 그의 사람됨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후에 명망이 차차 높아지니까 모두들 그를 요직에 발탁하려 하였는데 이경중(李敬中)만이 이조 전랑으로 있을 때 적극적으로 배척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외부의 의논이 ‘이경중이 훌륭한 사람을 질투한다.’고 떠들어 결국 이경중을 이조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막힌 길이 트이게 되어 곧 서로들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오히려 전일의 견해로 그의 사람됨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 신의 동료들도 이경중의 말을 들은 이는 싫어하는 이가 많았으니, 정여립이 신들에게 감정을 품고 반드시 기회를 보아 화를 전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자가 호남에 있을 때 서울 사람에게 보낸 글에서, 신을 지적하여 ‘큰 간악[巨奸]’이라 하였는데, 서익(徐益)의 상소가 나옴으로써 그 일이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다행하게도 전하께서 밝게 보살펴 주셔서 신을 죄에서 면해 주시고 신도 그때부터 조정에 있는 것이 불안하여서 농촌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은 알기 어렵다는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기왕의 일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처음 그 역적이 문자의 겉만 발라 꾸며 괴이한 행동으로 온 세상을 현혹하니, 잇따라 모든 선비들이 그의 농간에 말려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러한 기미를 미리 엿본 이가 혹 있었지만 반복(反覆) 부정(不靖)할까 근심하였을 뿐 어떻게 이처럼 극악무도한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습니까. 이제 보면 정여립의 간악한 죄상을 미리 안 사람은 이경중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신이 그 역적에 대하여 전에는 싫은 마음이 있었고 후에는 그의 기미를 엿보면서도 일찍이 그의 간악한 진상을 한마디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국가를 저버린 죄는 피할 수 없으니, 쫓겨나서 귀양 가게 되더라도 실로 달게 받겠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신의 심정을 가엾게 여겨 농촌으로 돌아가게 하여 문을 닫고 죄과를 반성하여 부끄러워서 죽게 해 주신다면 신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상이 특별히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의 심사가 백일(白日)에 질정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으니,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정승 정철이 위관(委官)으로 옥사를 공평하게 다스리지 못하여 한때의 선비들이 많이 연루되었는데, 선생의 상소가 올라오자 상이 이경중의 관작을 올려 주었고 무고를 당한 명사(名士)들이 차츰 풀려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여론이 선생이 한 번 상소한 힘이라 하여 서울 장안의 인사들이 그 상소문을 돌려 가며 읽었으며, 부녀자들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었다.
○ 이때 호남 사람 정암수(丁巖壽) 등이 상소하여 선비들을 모함하였는데, 지적한 가운데는 선생도 끼어 있었다. 상이 선생을 인견하여 특별히 돈독히 타이르시고 정암수 등을 체포하여 치죄하였다.
특별히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정승 정철이 영남 선비들이 역적을 두둔하였다 하여 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심문하려 하였다. 어느 날 재상들이 빈청에 모였다. 영의정 이산해가 정철에게 말하기를,
이때 정승 정철이 위관(委官)으로 옥사를 공평하게 다스리지 못하여 한때의 선비들이 많이 연루되었는데, 선생의 상소가 올라오자 상이 이경중의 관작을 올려 주었고 무고를 당한 명사(名士)들이 차츰 풀려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여론이 선생이 한 번 상소한 힘이라 하여 서울 장안의 인사들이 그 상소문을 돌려 가며 읽었으며, 부녀자들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었다.
○ 이때 호남 사람 정암수(丁巖壽) 등이 상소하여 선비들을 모함하였는데, 지적한 가운데는 선생도 끼어 있었다. 상이 선생을 인견하여 특별히 돈독히 타이르시고 정암수 등을 체포하여 치죄하였다.
특별히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정승 정철이 영남 선비들이 역적을 두둔하였다 하여 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심문하려 하였다. 어느 날 재상들이 빈청에 모였다. 영의정 이산해가 정철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영남 선비들을 조사하고 심문하려 한다는데, 영남 출신인 예조 판서에게는 왜 실정을 묻지 않소?”
하였다. 정철이 성이 나서 큰소리로 선생에게 말하기를,
“듣자니까 영남 선비들이 역적을 억울하다 하여 심지어 신원하여 구제하려는 자가 있다 하니 그대로 두고 불문에 붙일 수는 없소.”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영남 선비들이 그 수가 한이 없는데, 지금 사람을 보내 집집마다 호구마다 방문해서 심문한단 말이오? 아니면 누구누구를 지적하여 심문하겠단 말이오? 그대가 이 일을 꼭 성취시키려 한다면 온 나라 사람에게 큰 실망을 줄 것이오.”
하였다.
회의를 끝내고는 정철이 길가 어떤 집에 들어가 사람을 보내어 선생을 초청하였다. 선생이 가니 정철이 일어나 맞으면서,
회의를 끝내고는 정철이 길가 어떤 집에 들어가 사람을 보내어 선생을 초청하였다. 선생이 가니 정철이 일어나 맞으면서,
“여기는 나의 매부인 계림군(桂林君)의 집이오.”
하면서 곧 주인을 불러내어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을사사화 때 수레에 실려 형을 당할 뻔하다가 다행히 화를 모면한 사람들이오.”
라고 말하자, 선생은,
“만약 그렇다면, 그대는 옥사를 더욱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오.”
하고, 곧이어 말하였다.
“영남 선비들을 조사하고 심문한다는 일은 참으로 뜻밖이었소.”
정철은 말하기를,
“선비들은 공론이 있는 바인데, 역적이 역적인지를 모르겠기에 사람을 보내어 효유하려 할 뿐이었소.”
하자, 선생은 말하였다.
“그대가 만약 지극히 공정하게 옥사를 처리하였다면, 사람들이 효유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자연히 심복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록 집집마다 한 사람씩 보내어 말해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대가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한 도의 사람들을 휘몰아 예측할 수 없는 곤경에 빠뜨리기를 동한(東漢) 때 당고(黨錮)같이 할 작정이오?”
정철의 말이,
“그대의 말이 그러하니 그만두어야겠소.”
하였는데, 이튿날 정철이 오히려 전날 의논을 고집하면서 어사의 파견을 주청하였다.
이때 선생이 마침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오억령(吳億齡)이란 사람이 신중하고 성실하여 보낼 만하였기에 왕명을 받아 그를 보냈더니, 영남이 무사하였다.
○ 참의(參議) 이발(李潑)이 변경으로 귀양을 가는데 친구들도 감히 위문을 못하였다. 선생은 서리를 시켜 성문 밖까지 전송하였다. 이발은 시로 사례하였는데,
삼천리 밖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 / 三千里外遠遷客
일흔일곱 살 병든 어버이를 두고서 가네 / 七十七歲多病親
란 구절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다시 국문(鞫問)을 받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 선생은 면포(綿布)를 보내어 부조하였다.
○ 상이 대신과 재상들을 모아 놓고, 이발ㆍ이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 등의 가산 몰수를 의논하였다. 선생은 의논드리기를,
이때 선생이 마침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오억령(吳億齡)이란 사람이 신중하고 성실하여 보낼 만하였기에 왕명을 받아 그를 보냈더니, 영남이 무사하였다.
○ 참의(參議) 이발(李潑)이 변경으로 귀양을 가는데 친구들도 감히 위문을 못하였다. 선생은 서리를 시켜 성문 밖까지 전송하였다. 이발은 시로 사례하였는데,
삼천리 밖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 / 三千里外遠遷客
일흔일곱 살 병든 어버이를 두고서 가네 / 七十七歲多病親
란 구절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다시 국문(鞫問)을 받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 선생은 면포(綿布)를 보내어 부조하였다.
○ 상이 대신과 재상들을 모아 놓고, 이발ㆍ이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 등의 가산 몰수를 의논하였다. 선생은 의논드리기를,
“죄인이 반드시 자신의 죄를 승복해야 재산을 몰수하는 법인데, 지금 이 사람들은 다 승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재산까지 몰수한다는 것은 너무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이는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주-D001] 당고(黨錮) : 중국 후한(後漢)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에 환관이 세력을 쥐고 날뛰었는데, 진번(陳蕃)ㆍ이응(李膺) 등의 청류(淸流)들이 그들을 견제하려다가 도리어 종신금고(終身禁錮)에 처해진 일이다.
만력(萬曆) 18년 경인. 선생 49세
휴가를 얻어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가 뵈었다. 상이 내전(內殿 왕비)의 옷을 내려 주며 늙은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게 하고, 이어 서울로 모셔 와 봉양하라고 명하였다.
상은 선생이 어머니를 뵈러 다니느라고 조정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여겨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 오라 하며 지나가는 고을마다 음식물을 공급하고 호송토록 명하였다.
5월
20일(경신)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를 군위에 장사 지냈다.
29일(기사) 승진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6월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최영경을 구출하려고, 상소문을 초안하여 놓고 올리지 않았다.
최영경이 간사한 사람의 무고를 당하여, 서울 감옥에 구속되었다. 선생이 일찍이 대궐에서 정철을 만나 묻기를,
상은 선생이 어머니를 뵈러 다니느라고 조정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여겨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 오라 하며 지나가는 고을마다 음식물을 공급하고 호송토록 명하였다.
5월
20일(경신)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를 군위에 장사 지냈다.
29일(기사) 승진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6월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최영경을 구출하려고, 상소문을 초안하여 놓고 올리지 않았다.
최영경이 간사한 사람의 무고를 당하여, 서울 감옥에 구속되었다. 선생이 일찍이 대궐에서 정철을 만나 묻기를,
“최영경의 옥사가 어떻게 되었소?”
하고, 또 말하기를,
“그 사람은 고상한 선비로서 명망이 중한 사람이니, 옥사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오.”
하였다. 정철은 발끈 화를 내고 낯빛을 고치면서 최영경에 대한 언급에 매우 유감을 품고 있었다. 선생이 사리를 따져 가며 설명하니 정철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러한 생각이 있으면 왜 상감께 말씀을 드리지 않소.”
하였다. 선생은,
“이것은 중대한 옥사니 제삼자가 어떻게 감히 말을 하겠소. 오직 옥사를 담당한 사람만이 풀어 줄 뿐입니다.”
하였다.
며칠 후에 최영경이 사면을 받고 풀려났는데, 사간원에서 아뢰어 다시 감옥에 갇혔다. 최영경은 전번에 감옥살이를 할 때부터 폐병에 걸렸는데, 다시 구속되자 병이 악화되어 선생에게 약을 요청하였는데, 선생은 즉시 약을 제조하여 보내 주었다. 그리고 상소하여 구출하려고 상소문까지 지어 놓았으나, 아무런 이익 없이 도리어 화만 더하게 될까 다시 염려하여 올리지 않았다.
광국공신(光國功臣) 삼등(三等)에 올라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이란 호(號)를 내려 준 것은 종실의 계통을 바로잡은 공로가 두드러진 때문이다.
며칠 후에 최영경이 사면을 받고 풀려났는데, 사간원에서 아뢰어 다시 감옥에 갇혔다. 최영경은 전번에 감옥살이를 할 때부터 폐병에 걸렸는데, 다시 구속되자 병이 악화되어 선생에게 약을 요청하였는데, 선생은 즉시 약을 제조하여 보내 주었다. 그리고 상소하여 구출하려고 상소문까지 지어 놓았으나, 아무런 이익 없이 도리어 화만 더하게 될까 다시 염려하여 올리지 않았다.
광국공신(光國功臣) 삼등(三等)에 올라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이란 호(號)를 내려 준 것은 종실의 계통을 바로잡은 공로가 두드러진 때문이다.
만력(萬曆) 19년 신묘. 선생 50세
2월
특명으로 이조 판서를 겸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상소하여 적극적으로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특명으로 이조 판서를 겸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상소하여 적극적으로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삼공이 이조 판서를 겸한 예는 없었습니다. 신과 같이 보잘것없는 자야 실로 말할 것도 없겠지만, 후일 혹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이 신으로 구실을 삼는다면 이는 국가의 무궁한 화근이 신에게부터 시작되는 것이오니, 신은 차마 이러한 폐단을 직접 터놓을 수는 없습니다.”
상이 일렀다.
“어떤 사람이 정승의 지위에 있으며 조정의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흔드는 행동을 한 사람이 한 사람뿐만 아닌데 이 이조 판서를 겸하였기 때문인가? 그대는 직무에나 충실하고 사양하지 말며, 인재의 등용에 적격자를 잘 가려 조정의 기풍을 맑게 하라.”
사은숙배하는 날 다시 고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조 판서 최흥원(崔興源)을 불러 지시하기를,
“이 다음부터 벼슬을 시키는 모든 일들은 겸판서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겸직은 전과 같았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정세를 알리자고 주청하였는데, 그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일본에서 받아 온 답서에,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겸직은 전과 같았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정세를 알리자고 주청하였는데, 그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일본에서 받아 온 답서에,
“군대를 거느리고 명 나라에 쳐들어가겠다.”
하는 말이 있었다. 선생은 말하기를,
“마땅히 연유를 갖추어 명 나라에 보고해야 합니다.”
하였고, 영의정 이산해는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 만일 우리에게 일본과 상통하였다고 책망을 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니, 알리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사신의 왕래는 어느 나라나 일상적인 일입니다. 성화(成化) 연간에 일본이 우리에게, ‘중국에 공물을 바치도록 해 달라.’ 하였을 때도 사실대로 알렸더니, 명 나라에서는 칙서를 내려 주어 그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알리지 않는다면 대의에 어긋납니다. 더구나 왜적이 만약 실지로 중국을 침범할 의도가 있어서 다른 곳을 통하여 알리게 된다면, 명 나라에서 도리어 우리나라가 일본과 합심하여 알리지 않았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죄가 일본과 왕래하였다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알리지 않는다면 대의에 어긋납니다. 더구나 왜적이 만약 실지로 중국을 침범할 의도가 있어서 다른 곳을 통하여 알리게 된다면, 명 나라에서 도리어 우리나라가 일본과 합심하여 알리지 않았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죄가 일본과 왕래하였다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모두 선생의 의견이 옳다 하여, 김응남(金應南) 등을 명 나라에 보내어 그 사실을 알렸다.
이때 복건(福建) 사람 허의후(許儀後)ㆍ진신(陳申)이 일본에 잡혀 있으면서 벌써 일본의 정세를 비밀리에 보고하였으며, 유구국(琉球國)의 세자 상녕(尙寜)도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보고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만이 사신을 보내지 않자, 명 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내통하면서 두 마음을 품고 있지 않나 의심하였다.
그런데 각로 허국(許國)은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사람으로 말하기를,
이때 복건(福建) 사람 허의후(許儀後)ㆍ진신(陳申)이 일본에 잡혀 있으면서 벌써 일본의 정세를 비밀리에 보고하였으며, 유구국(琉球國)의 세자 상녕(尙寜)도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보고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만이 사신을 보내지 않자, 명 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내통하면서 두 마음을 품고 있지 않나 의심하였다.
그런데 각로 허국(許國)은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사람으로 말하기를,
“조선은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있으니 반드시 일본과 같이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김응남 등이 주문을 가지고 도착하였다. 그때까지 미심쩍게 여기던 명 나라 조정의 의론은 비로소 해소되었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상이 선생에게 전교하기를,
상이 선생에게 전교하기를,
“요동에서 자문이 온 후로 크게 근심하였는데, 지금 뜻밖에도 포상하는 칙서까지 이르렀다. 이는 그대들이 계획을 잘 세워 주선한 충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다.
형조 정랑 권율(權慄)을 천거하여 의주 목사를 삼고,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일본의 소식이 날이 갈수록 다급해졌다. 상이 비변사에 명을 내려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자 선생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교지에 응하였다. 두 사람은 이때 하급 관료로 별로 명망이 없었으나, 그후에 모두 국가를 중흥시키는 명장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순신의 공로가 더 드러났다.
이일(李鎰)로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과 교체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조정의 무장 중에서는 이일의 명망이 제일 높았고, 조대곤은 나이가 많아 장군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선생이 이일로 조대곤과 교체하자고 주청하였다. 병조 판서 홍여순이 말하기를,
형조 정랑 권율(權慄)을 천거하여 의주 목사를 삼고,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일본의 소식이 날이 갈수록 다급해졌다. 상이 비변사에 명을 내려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자 선생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교지에 응하였다. 두 사람은 이때 하급 관료로 별로 명망이 없었으나, 그후에 모두 국가를 중흥시키는 명장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순신의 공로가 더 드러났다.
이일(李鎰)로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과 교체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조정의 무장 중에서는 이일의 명망이 제일 높았고, 조대곤은 나이가 많아 장군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선생이 이일로 조대곤과 교체하자고 주청하였다. 병조 판서 홍여순이 말하기를,
“훌륭한 장수는 서울에 두어야 되니 이일은 보낼 수 없다.”
하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해야 하는 법인데, 더군다나 군사를 다스려 적병을 막는 일은 더욱 갑작스럽게 대처할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난리가 나게 되면, 이일은 끝내 보내지 않으려 해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니, 이왕 보낼 바엔 하루라도 빨리 보내 미리 난리에 대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난리가 난 뒤에 허둥지둥 엉뚱한 장수를 내려 보내면 그 사람이 그 지역의 형편을 잘 모르고, 또 군사의 실력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병법에서 아주 꺼리는 일이니 반드시 후회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비답이 없었다.
조종조(祖宗朝)의 진관법을 다시 쓰자고 주청하였다.
선생은 날마다 왜적이 침범할 것을 근심하여, 국방 경비의 일에 심혈을 기울여 비변사의 관료들과 상의하여 진관법을 다시 쓰자고 주청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조종조(祖宗朝)의 진관법을 다시 쓰자고 주청하였다.
선생은 날마다 왜적이 침범할 것을 근심하여, 국방 경비의 일에 심혈을 기울여 비변사의 관료들과 상의하여 진관법을 다시 쓰자고 주청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건국 초기에는 각도의 군사를 모두 진관에다 소속시켜서 사변이 일어나면, 진관에서 소속된 고을의 군사를 통솔하여 주장의 호령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진(鎭)이 비록 무너지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정돈하여 굳게 지켜 힘없이 도망하여 무너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지난 을묘년(1555, 명종10) 변란 뒤에 비로소 그 법을 개정하여, 분군법(分軍法)을 삼고, 각 고을을 순변사ㆍ방어사ㆍ조방장ㆍ도원수ㆍ병사ㆍ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진관이란 명칭이 비록 있기는 하오나, 사실은 서로 연관성이 없습니다. 만일 뜻밖에 변란이 일어나면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반드시 동원하여 주장이 없는 군사를 들판에 먼저 모이게 하고 장수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적군의 침범을 받으면 군사들은 겁부터 먹게 되니, 이것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는 길입니다. 군사들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 모으기 어려우니, 흩어진 후에 장수가 가 보았자 누구와 같이 적군을 상대하여 싸우겠습니까.
조종조 때 실시하였던 진관 제도를 다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제도는 평시에 훈련을 시켰다가 변란이 있으면 소집하고 또 앞과 뒤가 상응하며, 중앙과 지방이 서로 의지하여 불시의 변란에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으니, 전쟁에 편리합니다.”
지난 을묘년(1555, 명종10) 변란 뒤에 비로소 그 법을 개정하여, 분군법(分軍法)을 삼고, 각 고을을 순변사ㆍ방어사ㆍ조방장ㆍ도원수ㆍ병사ㆍ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진관이란 명칭이 비록 있기는 하오나, 사실은 서로 연관성이 없습니다. 만일 뜻밖에 변란이 일어나면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반드시 동원하여 주장이 없는 군사를 들판에 먼저 모이게 하고 장수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적군의 침범을 받으면 군사들은 겁부터 먹게 되니, 이것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는 길입니다. 군사들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 모으기 어려우니, 흩어진 후에 장수가 가 보았자 누구와 같이 적군을 상대하여 싸우겠습니까.
조종조 때 실시하였던 진관 제도를 다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제도는 평시에 훈련을 시켰다가 변란이 있으면 소집하고 또 앞과 뒤가 상응하며, 중앙과 지방이 서로 의지하여 불시의 변란에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으니, 전쟁에 편리합니다.”
그 내용이 각도에 하달되니, 경상 감사 김수(金晬)가,
“제승방략은 시행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변경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자, 그 일은 결국 잠자고 말았다.
그후 왜적이 침범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문경 이하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먼저 대구에 모여 순변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순변사가 미처 오지 않아서 드디어 적군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먼저 흩어졌다.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서는 며칠을 두고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겨우 농민 수백 명밖에 모으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패한 것이다.
7월
특명으로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게 하였다.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 황정욱이 파면되자 상이 영의정 이산해에게 물었다.
그후 왜적이 침범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문경 이하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먼저 대구에 모여 순변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순변사가 미처 오지 않아서 드디어 적군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먼저 흩어졌다.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서는 며칠을 두고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겨우 농민 수백 명밖에 모으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패한 것이다.
7월
특명으로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게 하였다.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 황정욱이 파면되자 상이 영의정 이산해에게 물었다.
“대신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산해가 선생을 이야기하자, 상도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오.”
하였다. 이튿날 대신들을 소집하여 대제학이 될 만한 이를 천거하라 하고 이르기를,
“그전 예(例)에 구애하지 말고 적격자만을 가리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들은 김성일ㆍ이덕형ㆍ이성중(李誠中) 세 사람을 천거하여 주의(注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전 예를 무시하고 좌의정을 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은 대제학을 맡을 자격이 못된다고 극력 진언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20년 임진. 선생 51세
3월
왜국의 사신이 부산포에 왔다.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왜가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를 보내 부산포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왜국의 사신이 부산포에 왔다.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왜가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를 보내 부산포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이 명 나라에 조공을 바치려 하는데 통할 길이 없으니, 만약 조선이 대신 명 나라에 알려 준다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변고가 있을 것이오. 나는 귀국의 번신(藩臣)이기 때문에 알리지 않을 수가 없소.”
이때 조정에서는 통신사를 문제 삼아 의론이 분분하였다. 선생은 주청하기를,
“문관(文官) 한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그 실정을 물어보소서.”
하였으나, 그 의론은 시행되지 않았다.
평의지가 10여 일이나 머물러 있었는데도 회답을 받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
4월
판윤 신립과 군사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신립이 변방 경비를 순시하고 황해도에서 돌아왔다. 선생이 묻기를,
평의지가 10여 일이나 머물러 있었는데도 회답을 받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
4월
판윤 신립과 군사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신립이 변방 경비를 순시하고 황해도에서 돌아왔다. 선생이 묻기를,
“오늘날 적군의 세력을 상대하기가 어떠하겠는가?”
하자, 신립은 매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과거에는 왜적이 다만 짧은 무기만을 믿었는데, 지금은 조총이란 장기(長技)를 함께 가졌으니, 가볍게 여길 수 없지 않소.”
하였다. 신립은,
“아무리 조총이 있다 한들 어찌 다 맞힐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태평한 세월만 누려 왔기 때문에 군사들이 겁이 많습니다. 만일 사실대로 변란이 난다면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의 생각으로는 몇 해 후에 군사 훈련이 익숙하여지면 혹 수습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처음이 몹시 걱정이오.”
신립은 도무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갔다.
13일(임인) 왜적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대신들과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곧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적군을 막자고 계청하였다.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간 길로 내려가게 하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로 내려가게 하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로 내려가게 하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로 조방장을 삼아 조령을 지키게 하였다.
특명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여 군사 일을 총괄하였다.
이때 이일이 정규군 3백 명을 인솔하고 가려 하였는데, 병조 판서 홍여순이 주선을 못해 주었다. 이일이 그 때문에 3일간이나 출발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계청하여, 이일은 먼저 가게 하고, 선생이 비변사에서 군사 3백 명을 차출하여 별장(別將) 유옥(兪沃)에게 인솔하여 가게 하였다. 그리고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13일(임인) 왜적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대신들과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곧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적군을 막자고 계청하였다.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간 길로 내려가게 하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로 내려가게 하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로 내려가게 하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로 조방장을 삼아 조령을 지키게 하였다.
특명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여 군사 일을 총괄하였다.
이때 이일이 정규군 3백 명을 인솔하고 가려 하였는데, 병조 판서 홍여순이 주선을 못해 주었다. 이일이 그 때문에 3일간이나 출발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계청하여, 이일은 먼저 가게 하고, 선생이 비변사에서 군사 3백 명을 차출하여 별장(別將) 유옥(兪沃)에게 인솔하여 가게 하였다. 그리고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홍여순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니 체임시키소서.”
하니, 이에 김응남으로 대신시켰다.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빨리 신립을 보내 이일을 후원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때 대간이 대신으로 체찰사를 삼자고 주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선생은 그 명을 받고, 김응남으로 부체찰사를 삼기로 주청하였다.
전 목사(牧使) 김여물(金汝岉)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었는데, 그 사람은 꽤 무장의 지략이 있었다. 계청하여 죗값으로 종군하게 하고, 대궐 밖에 나와서 무사들을 모집하니 구름 모이듯 하였다.
이때 적군은 벌써 조령 가까이 와 있었다. 신립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빨리 신립을 보내 이일을 후원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때 대간이 대신으로 체찰사를 삼자고 주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선생은 그 명을 받고, 김응남으로 부체찰사를 삼기로 주청하였다.
전 목사(牧使) 김여물(金汝岉)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었는데, 그 사람은 꽤 무장의 지략이 있었다. 계청하여 죗값으로 종군하게 하고, 대궐 밖에 나와서 무사들을 모집하니 구름 모이듯 하였다.
이때 적군은 벌써 조령 가까이 와 있었다. 신립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이일이 고립된 군사를 이끌고 전방에 있지만 후방에서 호응해 줄 장수가 없고, 체찰사께서 비록 가신다 하더라도 싸우는 장수는 아니십니다. 어째서 맹장을 먼저 내려 보내 이일을 도와주도록 하지 않습니까?”
하고, 곧 스스로 가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즉시 부체찰사와 함께 임금께 아뢰어 신립을 순변사로 삼았다. 신립이 출발할 때 군사를 모집하니 한 사람도 따라가려는 자가 없었다. 신립이 화를 내자 선생이 말하기를,
선생은 즉시 부체찰사와 함께 임금께 아뢰어 신립을 순변사로 삼았다. 신립이 출발할 때 군사를 모집하니 한 사람도 따라가려는 자가 없었다. 신립이 화를 내자 선생이 말하기를,
“당신은 갈 길이 바쁘니 내가 모집한 군사를 먼저 데리고 가시오. 나는 별도로 모집하여서 가겠소.”
하고, 이어 군관의 명부를 주니 신립이 드디어 떠났다.
세자를 세워 인심을 정착시키자고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때 적군의 기세가 날이 갈수록 급박하였다. 선생이 대신들과 세자를 세워 인심이 정착할 곳이 있게 하자고 계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자를 세워 인심을 정착시키자고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때 적군의 기세가 날이 갈수록 급박하였다. 선생이 대신들과 세자를 세워 인심이 정착할 곳이 있게 하자고 계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궁(中宮)이 만일 원자(元子)를 낳게 되면 처리하기가 어려울 게 아닌가?”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송 인종(宋仁宗)은 나이 겨우 서른 남짓하여서도 사마광(司馬光) 같은 분들이 빨리 세자를 세우자고 하였는데, 어찌 예측한 바가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한참 생각하더니,
상이 한참 생각하더니,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가 될 만하다.”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내가 본디 병이 많고 또 나라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종묘를 받들고 국가를 다스리겠는가. 세자에게 아예 왕위를 전하고 싶은데 어떠하오?”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서는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세자를 때때로 전하 곁에 있게 하여 모든 사무를 참여하여 처리하도록 하면 되는데 어찌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홍복(弘福)을 누리시어 어려움을 구제하소서.”
경상도 우병사 김성일을 사면하자고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앞서 조정의 공론은, 왜적의 침입을 근심하여, 영남은 적병이 먼저 침입할 것이니 병법을 아는 무관을 택하여서 지방 장수의 책임을 담당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상이 특히 김성일을 우병사로 삼고 이르기를,
앞서 조정의 공론은, 왜적의 침입을 근심하여, 영남은 적병이 먼저 침입할 것이니 병법을 아는 무관을 택하여서 지방 장수의 책임을 담당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상이 특히 김성일을 우병사로 삼고 이르기를,
“김성일이 전에 왜적은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기에, 만일 변란이 있으면 그를 시켜 돌격하도록 해야 되겠다고 했었다.”
하였다. 선생이 계청하기를,
“김성일은 유신(儒臣)이옵니다. 이런 때에 변방 장수의 책임에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와서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아 오게 하여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이때 와서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아 오게 하여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김성일이 전날에 한 말은 그 의도가 민심을 진정시키자는 데 있으니 너무 허물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난에 임하여 주장을 바꾸는 것은 정당한 계책이 못 되옵니다. 바라옵건대, 우선 죄를 용서하여 스스로 충성을 다하게 하옵소서.”
상은 그래도 듣지 않았었는데, 마침 적군을 무찌르고 수급을 바치는 김성일의 장계(狀啓)가 왔다. 상이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김성일의 장계 가운데,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겠다.’라는 말이 있는데, 김성일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김성일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혹 모자란다 하더라도 이번 말은 실수하지 않을 것을 신이 책임질 수 있사옵니다.”
하였다. 상의 노여움이 풀리자 곧 초유사(招諭使)를 제수하였다.
30일(기미) 어가(御駕)를 모시고 서쪽으로 갔다.
신립이 떠난 뒤로 서울 사람들은 날마다 승첩한 소식을 기다리다가 패전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온 장안이 크게 술렁거렸으며, 대궐 안에 경호병과 시종들은 거의 다 도망하였다.
상이 재상을 소집하여 피란할 것을 의논하였다. 대신들이 계청하기를,
30일(기미) 어가(御駕)를 모시고 서쪽으로 갔다.
신립이 떠난 뒤로 서울 사람들은 날마다 승첩한 소식을 기다리다가 패전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온 장안이 크게 술렁거렸으며, 대궐 안에 경호병과 시종들은 거의 다 도망하였다.
상이 재상을 소집하여 피란할 것을 의논하였다. 대신들이 계청하기를,
“잠깐 평양으로 옮겼다가 명 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회복할 계획을 도모하십시오.”
하자, 장령 권협(權悏)이 청대하여 큰소리로,
“서울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이 제가끔 떠들어 대어 누구의 말인지 분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선생이 권협에게 말하기를,
“아무리 위급할 때라도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이럴 수가 없지 않소.”
하고, 인하여 다음과 같이 계청하였다.
“권협의 말이 매우 충성스러우나 다만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왕자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를 따르게 하소서.”
의논이 결정되자 여러 대신들과 합문 밖에 나와 있었는데, 상은 영의정과 재상들 수십 명이 호종하고, 선생은 남아서 서울을 지키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명령이 내리기 전에 이항복은 계청하여 선생이 어가를 모시도록 윤허를 받았다.
○ 백사(白沙) 이항복의 수기(手記)는 다음과 같다.
○ 백사(白沙) 이항복의 수기(手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처음 일어나 적군이 상주를 침범하자 공을 도체찰사로 삼았는데, 출발도 하기 전에 충주에서 패전한 보고가 들어와 그날로 평양으로 옮기라는 전교가 내렸다.
그때 나는 도승지로서 정청(政廳)에 있었는데, 명을 받고 승정원에 들어가니 대궐 안이 벌써 술렁거리며 질서가 엉망이었다. 동료들과 상의하여 선정문(宣政門) 앞에 나가서 편의대로 일을 아뢰었는데, 조금 있다가 공으로 서울을 지키게 한다는 전갈이 있었다. 내가 전갈하러 온 사람을 대하며 노사형(盧士馨)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피란 간다는 명령이 내려지자 궁중은 이미 텅 비었으니, 서울을 떠날 때는 호종하는 이가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만약 국경 끝까지 피란 가서 머물게 되면, 강 하나 건너면 곧 명 나라 땅입니다. 거기에 가면 당연히 수작하고 대응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조정 대신으로 명민하고 숙달되어 전고에 밝고 외교에 능숙한 이는 유모(柳某) 한 사람뿐입니다. 지금 어가가 떠나면 서울을 지킬 도리가 없는데, 유모를 남겨 두어 보았자 패전 신하밖에 안 되니, 어가를 호종케 하면 반드시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상감께 계청하여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노사형이 턱을 끄덕이고, 여러 동료들도 모두 옳다고 했다.
내가 즉시 계사를 초고한 채로 정서할 겨를도 없이 전갈 온 사람에게 주어서 상감께 아뢰었더니, 상이 곧 윤허하고, 다시 이양원(李陽元)에게 명하여 남아서 서울을 지키게 하였다. 그후에 상감은 공이 명을 받고 이행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아마 경황이 없을 때 일이라 상감께서 혹 우연히 잊으신 게 아니었는지.”
그때 나는 도승지로서 정청(政廳)에 있었는데, 명을 받고 승정원에 들어가니 대궐 안이 벌써 술렁거리며 질서가 엉망이었다. 동료들과 상의하여 선정문(宣政門) 앞에 나가서 편의대로 일을 아뢰었는데, 조금 있다가 공으로 서울을 지키게 한다는 전갈이 있었다. 내가 전갈하러 온 사람을 대하며 노사형(盧士馨)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피란 간다는 명령이 내려지자 궁중은 이미 텅 비었으니, 서울을 떠날 때는 호종하는 이가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만약 국경 끝까지 피란 가서 머물게 되면, 강 하나 건너면 곧 명 나라 땅입니다. 거기에 가면 당연히 수작하고 대응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조정 대신으로 명민하고 숙달되어 전고에 밝고 외교에 능숙한 이는 유모(柳某) 한 사람뿐입니다. 지금 어가가 떠나면 서울을 지킬 도리가 없는데, 유모를 남겨 두어 보았자 패전 신하밖에 안 되니, 어가를 호종케 하면 반드시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상감께 계청하여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노사형이 턱을 끄덕이고, 여러 동료들도 모두 옳다고 했다.
내가 즉시 계사를 초고한 채로 정서할 겨를도 없이 전갈 온 사람에게 주어서 상감께 아뢰었더니, 상이 곧 윤허하고, 다시 이양원(李陽元)에게 명하여 남아서 서울을 지키게 하였다. 그후에 상감은 공이 명을 받고 이행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아마 경황이 없을 때 일이라 상감께서 혹 우연히 잊으신 게 아니었는지.”
○ 이때 대부인이 서울에 있었고 겸암공은 마침 사복 첨정(司僕僉正)이었다.
선생이 상에게 울면서 아뢰어,
선생이 상에게 울면서 아뢰어,
“나랏일이 이러하니, 신은 마땅히 목숨을 바쳐 어가를 따라가겠사오나, 신의 형은 벼슬을 해임시켜 어머니와 함께 피란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자, 상이 측은하게 여겨서 윤허하였다.
겸암공이 곧 대부인을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선생이 울면서 하직 인사를 하니, 대부인이 위로하면서,
겸암공이 곧 대부인을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선생이 울면서 하직 인사를 하니, 대부인이 위로하면서,
“너는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내 염려는 하지 말라.”
타이르자, 선생은 두 번 절하고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었다.
5월
1일(경신) 임금의 행차를 모시고 임진 나루에 이르렀다.
상이 대신들을 불러 같이 배를 타고 통곡하시며 선생에게,
5월
1일(경신) 임금의 행차를 모시고 임진 나루에 이르렀다.
상이 대신들을 불러 같이 배를 타고 통곡하시며 선생에게,
“내가 경을 썼는데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라고 하자, 선생은 머리를 조아리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상이 명하여 술을 내렸으나, 선생은 흐느끼느라 마시지 못하였다. 상이 위로하며,
“만일 국가가 중흥하자면 의당히 경이 힘써야 할 터이니 모름지기 몸조심하시오.”
하자, 선생이 더욱 머리를 조아려 배사(拜謝)하였다.
어가를 모시고 동파에 이르렀다.
백사(白沙)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가를 모시고 동파에 이르렀다.
백사(白沙)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가가 동파에 닿아 대신들을 불렀다. 나는 이때 도승지로서 임금을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상이 가슴을 치면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대답해 아뢰기를, ‘의주로 가서 머물고 계시다가 만약 팔로(八路)가 다 함락이 되면 명 나라에 가서 호소하시는 것도 가할 줄 아옵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안 됩니다. 임금께서 우리나라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난다면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나와 십수 차 변론하였으나, 양쪽이 기꺼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최후로 공이 격렬한 음성으로 아뢰기를, ‘지금 동북 지방의 모든 도는 예전과 같고 호남에서는 충의의 지사들이 날을 다투어 벌 떼처럼 일어나는 마당에 어찌 이런 중대사를 갑자기 결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공의 뜻을 깨닫고 침묵하였다.
뒷날 공이 판서(判書) 이공저(李公著 이성중(李誠中))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모(李某)를 보면 내 뜻을 말해 주시오. 어찌 경솔하게 나라를 버리자는 말을 하였는가 하고 말이오. 이모가 비록 아랫바지를 찢어 발을 싸매고 길거리에서 죽더라도 아녀자나 환관의 충성에 지나지 않소. 명 나라로 간다는 말이 한번 알려지는 날엔 인심은 와해될 것이니, 누가 수습하겠는가.’ 하였다.
그때는 내가 아직 자세히 깨닫지 못하였다. 어가가 영변에 이르자 양궁(兩宮)이 비로소 갈리고 잘못된 그 말이 크게 퍼져 서관(西關)의 인심이 수습할 길이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앞을 내다보는 공의 슬기에 감복하였다. 뒤에 사석에서 공을 찾아보고 사과하기를, ‘급작스러운 경우에 잘못 생각하고 대세를 그르쳤으니,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라고 하자, 공이 웃으며 ‘나도 당시에 명백히 말하지 못하고 다만 불가하다 했을 뿐이니, 내게도 실수가 없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나와 십수 차 변론하였으나, 양쪽이 기꺼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최후로 공이 격렬한 음성으로 아뢰기를, ‘지금 동북 지방의 모든 도는 예전과 같고 호남에서는 충의의 지사들이 날을 다투어 벌 떼처럼 일어나는 마당에 어찌 이런 중대사를 갑자기 결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공의 뜻을 깨닫고 침묵하였다.
뒷날 공이 판서(判書) 이공저(李公著 이성중(李誠中))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모(李某)를 보면 내 뜻을 말해 주시오. 어찌 경솔하게 나라를 버리자는 말을 하였는가 하고 말이오. 이모가 비록 아랫바지를 찢어 발을 싸매고 길거리에서 죽더라도 아녀자나 환관의 충성에 지나지 않소. 명 나라로 간다는 말이 한번 알려지는 날엔 인심은 와해될 것이니, 누가 수습하겠는가.’ 하였다.
그때는 내가 아직 자세히 깨닫지 못하였다. 어가가 영변에 이르자 양궁(兩宮)이 비로소 갈리고 잘못된 그 말이 크게 퍼져 서관(西關)의 인심이 수습할 길이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앞을 내다보는 공의 슬기에 감복하였다. 뒤에 사석에서 공을 찾아보고 사과하기를, ‘급작스러운 경우에 잘못 생각하고 대세를 그르쳤으니,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라고 하자, 공이 웃으며 ‘나도 당시에 명백히 말하지 못하고 다만 불가하다 했을 뿐이니, 내게도 실수가 없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어가를 모시고 개성부에 이르렀다. 신할(申硈)을 보내어 경성(京城)을 지키도록 계청하였으며, 또 사방 백성에게 효유하여 힘을 합하여 적을 소탕하도록 계청하였다.
어가가 떠난 뒤에 서울의 인심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선생이 계청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어가가 떠난 뒤에 서울의 인심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선생이 계청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할(申硈)에게 급히 달려가 유도대장(留都大將) 및 도원수와 협력하여 성을 지키도록 해서 인심을 굳게 하소서. 또한 잠시 동안 난을 피했다가 환도할 것을 기약하고 삼남 백성들을 깨우쳐 ‘만약 충의심을 가지고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은 모두 민병들을 규합 인솔해서 각자 싸워 적을 섬멸하기에 힘을 합하라.’ 하고 타이르십시오. 중앙이나 지방에 무과 출신은 수대로 모두 뽑아 싸움터에 나가게 하고, 개성부는 마름쇠를 많이 만들게 해서 전쟁의 용도에 대비하도록 하며, 본도에서는 창고의 곡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옵소서.”
영의정에 승진되자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곧 파직되었다.
이때 대간이 의논하여 영의정 이산해는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망쳐 놓았으니 관직을 삭탈하도록 아뢰자, 상께서 파직을 명하고, 이어 선생을 불러 영의정에 내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때 대간이 의논하여 영의정 이산해는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망쳐 놓았으니 관직을 삭탈하도록 아뢰자, 상께서 파직을 명하고, 이어 선생을 불러 영의정에 내정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은 이산해와 더불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국사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산해는 이미 파직되었는데 신만이 어찌 감히 스스로 무죄라고 해서 정승으로 있겠습니까.”
하며 계상(階上)을 내려와서 대죄하였다. 상이 승지 이충원(李忠元)에게 부축하여 일으켜 전(殿)에 오르도록 명하니, 선생이 굳이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죽을죄를 지었으니 끝내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물러나 또 뜰 복판에 엎드려 있었다. 상이 명령하여 일으켜 내보내고 전상에 있는 여러 제신들에게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게 하였다. 선생이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이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는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허물을 자책하고 극구 사양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날 저녁에야 결국 파면되니, 이는 신집(申磼) 등의 모함 때문이었다. 선생은 비록 면직되었으나 어가를 모심에 감히 뒤처지지 않았다.
어가가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적병이 벌써 봉산에 이르렀다. 선생이 우의정 윤두수에게 말하였다.
어가가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적병이 벌써 봉산에 이르렀다. 선생이 우의정 윤두수에게 말하였다.
“적의 척후병이 응당 강 밖까지 이르렀을 터인데, 영귀루(詠歸樓) 아래는 강물이 두 갈래를 이루어 도보로 건널 만합니다. 만약 적이 우리 백성을 길잡이를 삼아 몰래 건너오면 성이 위태롭습니다. 어찌 급히 이일(李鎰)을 보내 지키도록 하여 뜻밖의 경우를 대비하지 않으십니까.”
우상이 바로 이일을 보냈는데, 그가 성을 나가 경우 10여 리를 갔을 무렵 강 남쪽 언덕을 바라보니 수백 명의 적병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일이 급히 무사에게 영을 내려 섬 안에 들어가 활을 쏘아 대 연달아 6, 7명을 거꾸러뜨리자 적은 드디어 퇴각하였다.
6월
서용(敍用)되어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제수되었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백사 수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6월
서용(敍用)되어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제수되었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백사 수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가가 평양에 머물고 있었을 때 신백준(申伯峻)ㆍ구원유(具元裕)가 함부로 떠들어 대기를, ‘유모(柳某)가 아상(鵝相 이산해를 말함)과 더불어 죄는 같은데 처벌이 달라 혼자만 면한 것은 마땅치 못하다.’ 하였다. 하루는 삼사가 모인 자리에서 장차 이 일을 논의할 때, 정자한(鄭子翰)이 당시 장령의 자리에서 있었는데 피해서 나오다가 문에서 나를 만나 하는 말이 ‘오늘 유모를 논죄한다 합니다.’ 하였다. 나는 듣자마자 달려 들어가 부제학 홍군서(洪君瑞)를 만나 말하기를, ‘만대에 우러러볼 일이 이 한 거사에 달려 있으니, 공이 만약 이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이제부터 당신과 관계를 끊겠습니다.’ 하였다. 홍군서가 말하기를, ‘좋습니다. 내 뜻도 같습니다.’ 하며 곧 들어가 큰소리를 치니, 드디어 일이 중지되었다. 당시에 공은 사저에 물러나 감히 공무를 보는 곳에 들어오지 못하고 엎드려 있다가 내가 찾아뵈면 자신의 허물만을 깊이 인책할 따름이었다.”
상의 명을 받들어 명장(明將)을 접대하였다.
이때 요동에서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곧 도성을 잃고 어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며, 또한 왜병이 벌써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왜적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창졸간에 이 지경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라 의심하였고 혹자는 우리나라가 왜병의 길잡이가 되었다고까지 말하였다.
이에 진무사(鎭撫使) 임세록(林世祿)을 보내 왜적의 상황을 탐지하게 하였다. 선생이 그와 연광정(練光亭)에 올라 왜적의 척후병을 가리켜 보였더니, 임세록이 자문의 회답을 재촉해서 급히 돌아갔다.
평양을 굳게 지키자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처음에 조정의 신하들이 적병이 가까이 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성 밖을 나가 난을 피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때 요동에서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곧 도성을 잃고 어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며, 또한 왜병이 벌써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왜적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창졸간에 이 지경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라 의심하였고 혹자는 우리나라가 왜병의 길잡이가 되었다고까지 말하였다.
이에 진무사(鎭撫使) 임세록(林世祿)을 보내 왜적의 상황을 탐지하게 하였다. 선생이 그와 연광정(練光亭)에 올라 왜적의 척후병을 가리켜 보였더니, 임세록이 자문의 회답을 재촉해서 급히 돌아갔다.
평양을 굳게 지키자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처음에 조정의 신하들이 적병이 가까이 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성 밖을 나가 난을 피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일의 사세가 서울에 있을 때와 다릅니다. 그때는 인심이 붕괴되어 지키고자 해도 지킬 수 없었으나 지금은 성 앞에는 강이 막혀 있고 민심이 자못 굳게 뭉쳐 있습니다. 또한 가까이는 중원 지방이 있으니 여러 날 굳게 버텨 나가면 명 나라의 구원병이 올 것이므로 서로 의지해서 싸워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부터 의주까지는 다시 웅거할 곳이 없으니, 형세상 필경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윤 좌상은 선생의 의견을 좇았다. 이때 왜적이 대동강 변에 모습을 드러내자 재신(宰臣)들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아울러 궁인들을 호위하고 먼저 성을 나갔다. 이에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칼을 휘두르며 길을 막고 몰려들어 종묘사직의 신주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부숴 버렸다.
선생이 변고를 듣고 궁문 밖에 이르러 한 늙은 토관(土官)을 불러 꾸짖었다.
선생이 변고를 듣고 궁문 밖에 이르러 한 늙은 토관(土官)을 불러 꾸짖었다.
“너희가 힘을 다하여 성을 지켜 어가가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충성이라 하겠으나 다만 이것을 기화로 난을 일으켜 궁문을 시끄럽게 한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지금 조정에선 성 지키자고 계청하려 하는데, 너희는 이것이 무슨 짓들이냐.”
평양 백성들은 본시 선생에게 심복하고 있던 터라 곧 몽둥이를 버리며 사죄하고 물러갔다.
이때 이미 조정 안에서는 성을 나가기로 의논이 정해졌으나 어디로 갈 것인지는 정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조신들은 북도가 땅이 궁벽하고 길이 험하여 병란을 피할 만하다고 말하였으나, 선생은 강경히 주장하며 목메어 울었다.
이때 이미 조정 안에서는 성을 나가기로 의논이 정해졌으나 어디로 갈 것인지는 정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조신들은 북도가 땅이 궁벽하고 길이 험하여 병란을 피할 만하다고 말하였으나, 선생은 강경히 주장하며 목메어 울었다.
“어가가 서쪽으로 거둥한 것은 본래 명병에게 의지하여 회복을 도모하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이미 청병해 놓고 도리어 북도로 깊이 들어갔다가 적병에 갇혀 버린다면 명 나라의 소식마저 끊어져 통할 수 없으니, 더구나 무슨 힘을 빌려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장차 그 땅으로 들어간 뒤에 적병이 뒤따라 쫓아오면 사세는 궁해져 더 갈 땅이 없게 될 것인데, 또다시 북쪽으로 오랑캐에게 달려간단 말씀이옵니까. 지금 조신들의 가속들이 북도에서 많이 피란하고 있으므로 개인 사정을 돌아보고 모두 북도로 가는 것이 편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늙은 어미가 동쪽으로 피란하였으니 반드시 관령(關嶺) 어디쯤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니, 신의 사정으로 말하면 어찌 북쪽으로 갈 마음이 없겠습니까. 단지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해 저 신하들과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진달합니다.”
상이 측은히 여겨 선생에게 이르기를,
“경의 어머니는 어디 있단 말이냐. 나의 탓이로다.”
하였다.
어가가 드디어 영변으로 향하였고, 선생은 명장을 접대하기 위하여 그대로 머물렀다.
평양을 나와 어가를 뒤쫓아 박천(博川)에서 만났다.
이때 오랫동안 가물어 강물이 날마다 줄어들었다. 선생이 승상 윤두수에게 말하기를,
어가가 드디어 영변으로 향하였고, 선생은 명장을 접대하기 위하여 그대로 머물렀다.
평양을 나와 어가를 뒤쫓아 박천(博川)에서 만났다.
이때 오랫동안 가물어 강물이 날마다 줄어들었다. 선생이 승상 윤두수에게 말하기를,
“상류 쪽으로 얕은 여울이 많으므로 적은 반드시 여기를 이용하여 건널 것이니, 어찌 엄하게 대비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원수 김명원(金命元)이 말하기를,
“이미 이윤덕(李潤德)으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윤덕의 무리를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오.”
하며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을 가리켜 말하였다.
“공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 봐야 일에는 아무 이익이 없으니, 가서 강의 여울을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공이 말하기를,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며, 곧 일어나 나갔다.
선생은 이때 상의 명을 받아 명 나라 장수를 맞아 접대하는 일로 군무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속으로 일의 조짐이 빨리 명 나라 장수를 맞아들여 와 일의 해결을 보느니만 못하다 생각해서, 날이 저물 무렵 성을 나가 그 다음날 안주에 이르니, 요동 진무사 임세록이 또 왔다. 자문을 받아 행재소로 전송하였다.
이튿날 어가가 박천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임금을 뵙고 아뢰기를,
선생은 이때 상의 명을 받아 명 나라 장수를 맞아 접대하는 일로 군무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속으로 일의 조짐이 빨리 명 나라 장수를 맞아들여 와 일의 해결을 보느니만 못하다 생각해서, 날이 저물 무렵 성을 나가 그 다음날 안주에 이르니, 요동 진무사 임세록이 또 왔다. 자문을 받아 행재소로 전송하였다.
이튿날 어가가 박천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임금을 뵙고 아뢰기를,
“평양의 형세로는 왜적이 반드시 얕은 여울목을 이용하여 도강할 것이오니, 마땅히 많은 마름쇠를 물 밑에 장치하여 뜻밖의 경우를 대비하소서.”
하고 또 다음과 같이 아뢰면서 하직하고 나왔다.
“평양의 서쪽 강서(江西), 용강(龍岡), 증산(甑山), 함종(咸從) 등의 고을에는 창고에 곡식이 많으며 백성들도 많이 살고 있는데, 적이 벌써 가까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반드시 놀라 흩어질 것입니다. 마땅히 급히 시신(侍臣) 한 사람을 보내어 진무하도록 하시고, 또한 병사들을 거두어 계속 원병을 삼으소서. 신은 일이 급하여 지체할 수 없으니, 밤새 달려가 명 나라 장수를 맞아들여 오기를 기약하겠습니다.”
도중에 적이 벌써 얕은 여울물을 건너와 우리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곧 행재소에 알리고, 선생은 그날 밤에 가산군으로 들어갔다.
정주에 머물면서 창고의 곡식을 약탈한 농민들을 사로잡았다.
어가가 평양성을 떠나자 인심이 와해되어 어가가 지나간 읍의 창고 곡식은 모두 난민에게 약탈되었다. 이날 어가가 정주로부터 선천을 향할 때 선생에게 정주에 머물러 진무하도록 명을 내렸다.
마침 가서 보니 창고의 곡식을 털려는 도적 수백 명이 와서 창고 아래 모여 있었다. 선생이 이들을 제압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계교를 써 뒤이어 오는 자 8, 9인을 사로잡고 이들로 하여금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 손을 뒤로 결박 지어 도로를 순회하며,
정주에 머물면서 창고의 곡식을 약탈한 농민들을 사로잡았다.
어가가 평양성을 떠나자 인심이 와해되어 어가가 지나간 읍의 창고 곡식은 모두 난민에게 약탈되었다. 이날 어가가 정주로부터 선천을 향할 때 선생에게 정주에 머물러 진무하도록 명을 내렸다.
마침 가서 보니 창고의 곡식을 털려는 도적 수백 명이 와서 창고 아래 모여 있었다. 선생이 이들을 제압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계교를 써 뒤이어 오는 자 8, 9인을 사로잡고 이들로 하여금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 손을 뒤로 결박 지어 도로를 순회하며,
“창고를 약탈한 도적을 사로잡아 처형하려 한다.”
고 말하니 이에 먼저 모인 자들이 모두 황황히 놀라 흩어져 달아났다. 정주의 창고 곡식은 이 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었고, 여러 읍의 창고를 약탈하는 근심거리도 근절되었다.
정주를 출발하여 어가를 뒤쫓아 용천에서 만났다.
종사관 홍종록(洪宗祿)을 구성(龜城)에 보내어 군량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이때 군읍의 백성들이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선생이 곽산에 이르러 종사관 홍종록을 불러 말하였다.
정주를 출발하여 어가를 뒤쫓아 용천에서 만났다.
종사관 홍종록(洪宗祿)을 구성(龜城)에 보내어 군량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이때 군읍의 백성들이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선생이 곽산에 이르러 종사관 홍종록을 불러 말하였다.
“연도의 창고 곡식이 한번 비게 되면 비록 명 나라 군사가 오더라도 무엇으로 공급하여 구제하겠는가. 이 지역에서 오직 구성 한 읍만이 곡식의 비축이 넉넉한데 들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수송할 대책이 없다고 하네. 그대가 구성에 오래 머물러 그곳 사람들이 그대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산골짜기에 숨어 있을지라도 내려와서 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급히 가서 타일러 관리나 아전 백성을 막론하고 한 고을의 모든 힘을 합해서 정주와 가산으로 곡식을 운반한다면 일을 거의 구제할 수 있네.”
홍종록은 비장하게 응낙하고 곧 떠났다.
의주에 도착하여 다시 계사(啓辭)를 올려 시무를 조목별로 진술하였다.
의주에 도착하여 다시 계사(啓辭)를 올려 시무를 조목별로 진술하였다.
처음에 계청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적병이 바야흐로 평양에 있으나, 황해ㆍ강원의 군읍은 아직도 대부분 완전하고 남방의 대군이 또한 수원에 있습니다. 만약 흩어지고 도망한 병사들을 불러 모아 명 나라 군사의 길잡이로 삼아 몇 길로 나누어 압축하면 적들은 반드시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할 것입니다. 미리 황해ㆍ경기ㆍ삼남 등에 알려 길을 따라 복병을 두어 곳곳마다 무찌르게 하고, 또한 수군으로 하여금 해로를 마저 끊게 하시옵소서.
1. 평양의 적세를 정탐해서 밤을 틈타 엄습하여 치기도 하며 혹은 흩어져 나오는 적을 나눠 죽이게 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행재소로 보내십시오.
1. 평양의 서쪽 세 길 중에 박천ㆍ태천은 가장 중요한 관문으로 강변의 모든 진(鎭)의 안위가 걸려 있는 곳입니다. 지금 정주에 이미 도원수가 있으니, 구성ㆍ태천도 한 장수를 두어 정주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여 날랜 군사로 방어 준비를 갖춘 뒤라야 한 도가 보전될 것입니다.
1. 명 나라 군사들을 향도할 때 한 길은 정주를 경유하고, 한 길은 선천을 경유하여 평양 서쪽으로 나가도록 하고, 또한 한 장수로 하여금 영변 동쪽의 모든 고을의 군사들을 징발해서 평양의 동쪽으로 나오게 하여 적병들로 하여금 포위하게 하소서.
1. 토병(土兵)은 날래고 용감하기가 남군(南軍)보다 갑절이니 군에 응모하는 자가 있으면 각별히 권장하여 흥기하게 하소서. 또한 본도의 민생들이 곤란함이 더욱 심하오니 모든 폐단을 일체 깨끗이 없애소서.
1. 본도의 재정과 곡식이 거의 고갈되고 유실되었으니, 만약 명군이 왜구를 평정할 땐 그들을 위로하고 먹일 양식을 어디에서 마련하겠습니까. 미리 계획을 세워 그 쓰임에 대비하소서.
1. 사세가 바야흐로 급해만 가는데 인심은 해이해져 계책을 꾸미고 처리하는 일이 매양 때에 뒤지는 것이 많으니, 마땅히 비변사로 하여금 시행할 모든 일을 급속히 거행하소서.
1. 나라의 기강이 해이한 나머지 수령들은 관직을 버리는 일을 능사로 알고 장수들은 패하여 달아나는 것으로 좋은 계책을 삼으니, 마땅히 규율을 재삼 밝혀서 군법으로 다스리소서.
1. 군의 공적 등급을 균일하게 하고 실정을 좇아 급속히 시행해서 격려하소서.
다시 계청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강변의 토병들을 여러 번 징발하였으므로 어찌 원망하고 괴롭게 여기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그 처자를 구휼하여 안정시키되 산 자는 은량(銀兩)으로 요량해 지급하고 죽은 자는 더욱 넉넉히 구휼하소서. 저 임욱경(任旭景)ㆍ이선(李宣) 등은 충렬스럽기가 특별히 남다르니,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더해 주시고 그 충혼을 위로하여 인심을 격동시키소서.
1. 무리를 지어 창고를 노략질한 무리들은 반드시 모두 난민이 아니라 배고픔에 견디다 못해 한 짓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수령들이 구휼에 힘쓰지 않아 그러하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쪽 사정을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적을 소탕하는 일에 힘쓰게 하되 공적이 있으면 평인과 같이 상을 주소서.
1. 토병을 비록 모았다고 해도 병기가 없으니 강변의 여러 진과 내지의 군읍에 활과 화살의 많고 적음을 마땅히 급하게 헤아려서 때맞추어 쓸 수 있게 하소서.
1. 무반 출신으로 맨 처음에 이일과 신립의 군관이 된 자가 또한 많았으나 한번 흩어진 뒤로는 다시 수습되지 않으니, 마땅히 검찰사(檢察使)로 하여금 길을 분담해서 불러 모아 행재소에 오게 하소서.
1. 화포를 만들 줄 아는 장인도 마땅히 불러 모아 제조하게 해서 전쟁의 쓰임에 대비하소서.
1. 왜적이 수백 리 가까이 있으므로 안으로 간첩을 엄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안 및 군중(軍中)으로 하여금 별도로 표호(標號)를 만들어 서로 식별할 수 있게 하소서.
1. 적병이 바야흐로 평양에 있으나, 황해ㆍ강원의 군읍은 아직도 대부분 완전하고 남방의 대군이 또한 수원에 있습니다. 만약 흩어지고 도망한 병사들을 불러 모아 명 나라 군사의 길잡이로 삼아 몇 길로 나누어 압축하면 적들은 반드시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할 것입니다. 미리 황해ㆍ경기ㆍ삼남 등에 알려 길을 따라 복병을 두어 곳곳마다 무찌르게 하고, 또한 수군으로 하여금 해로를 마저 끊게 하시옵소서.
1. 평양의 적세를 정탐해서 밤을 틈타 엄습하여 치기도 하며 혹은 흩어져 나오는 적을 나눠 죽이게 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행재소로 보내십시오.
1. 평양의 서쪽 세 길 중에 박천ㆍ태천은 가장 중요한 관문으로 강변의 모든 진(鎭)의 안위가 걸려 있는 곳입니다. 지금 정주에 이미 도원수가 있으니, 구성ㆍ태천도 한 장수를 두어 정주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여 날랜 군사로 방어 준비를 갖춘 뒤라야 한 도가 보전될 것입니다.
1. 명 나라 군사들을 향도할 때 한 길은 정주를 경유하고, 한 길은 선천을 경유하여 평양 서쪽으로 나가도록 하고, 또한 한 장수로 하여금 영변 동쪽의 모든 고을의 군사들을 징발해서 평양의 동쪽으로 나오게 하여 적병들로 하여금 포위하게 하소서.
1. 토병(土兵)은 날래고 용감하기가 남군(南軍)보다 갑절이니 군에 응모하는 자가 있으면 각별히 권장하여 흥기하게 하소서. 또한 본도의 민생들이 곤란함이 더욱 심하오니 모든 폐단을 일체 깨끗이 없애소서.
1. 본도의 재정과 곡식이 거의 고갈되고 유실되었으니, 만약 명군이 왜구를 평정할 땐 그들을 위로하고 먹일 양식을 어디에서 마련하겠습니까. 미리 계획을 세워 그 쓰임에 대비하소서.
1. 사세가 바야흐로 급해만 가는데 인심은 해이해져 계책을 꾸미고 처리하는 일이 매양 때에 뒤지는 것이 많으니, 마땅히 비변사로 하여금 시행할 모든 일을 급속히 거행하소서.
1. 나라의 기강이 해이한 나머지 수령들은 관직을 버리는 일을 능사로 알고 장수들은 패하여 달아나는 것으로 좋은 계책을 삼으니, 마땅히 규율을 재삼 밝혀서 군법으로 다스리소서.
1. 군의 공적 등급을 균일하게 하고 실정을 좇아 급속히 시행해서 격려하소서.
다시 계청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강변의 토병들을 여러 번 징발하였으므로 어찌 원망하고 괴롭게 여기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그 처자를 구휼하여 안정시키되 산 자는 은량(銀兩)으로 요량해 지급하고 죽은 자는 더욱 넉넉히 구휼하소서. 저 임욱경(任旭景)ㆍ이선(李宣) 등은 충렬스럽기가 특별히 남다르니,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더해 주시고 그 충혼을 위로하여 인심을 격동시키소서.
1. 무리를 지어 창고를 노략질한 무리들은 반드시 모두 난민이 아니라 배고픔에 견디다 못해 한 짓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수령들이 구휼에 힘쓰지 않아 그러하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쪽 사정을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적을 소탕하는 일에 힘쓰게 하되 공적이 있으면 평인과 같이 상을 주소서.
1. 토병을 비록 모았다고 해도 병기가 없으니 강변의 여러 진과 내지의 군읍에 활과 화살의 많고 적음을 마땅히 급하게 헤아려서 때맞추어 쓸 수 있게 하소서.
1. 무반 출신으로 맨 처음에 이일과 신립의 군관이 된 자가 또한 많았으나 한번 흩어진 뒤로는 다시 수습되지 않으니, 마땅히 검찰사(檢察使)로 하여금 길을 분담해서 불러 모아 행재소에 오게 하소서.
1. 화포를 만들 줄 아는 장인도 마땅히 불러 모아 제조하게 해서 전쟁의 쓰임에 대비하소서.
1. 왜적이 수백 리 가까이 있으므로 안으로 간첩을 엄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안 및 군중(軍中)으로 하여금 별도로 표호(標號)를 만들어 서로 식별할 수 있게 하소서.
평안 우후(虞候) 김성보(金星報)로써 명군을 향도하도록 계청하였다.
이때 명군이 조석 사이에 압록강을 건너오자, 조정에선 청수 만호(靑水萬戶) 조숙(趙鷫)으로 향도를 삼았다. 선생은 조숙의 명망과 관직이 보잘것없고 통제할 만한 재주가 아니라고 여겨 본도 우후 김성보가 현재 무관 가운데서 조금 나으므로 주상께 아뢰어 그를 보냈다.
차자를 올려 요동의 자문을 논하였고 겸해서 일의 마땅함을 진술하였다.
요동의 자문에는 중국 조정이 우리나라가 왜적과 더불어 동모(同謀)한다고 힐책하는 말이 있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었다.
이때 명군이 조석 사이에 압록강을 건너오자, 조정에선 청수 만호(靑水萬戶) 조숙(趙鷫)으로 향도를 삼았다. 선생은 조숙의 명망과 관직이 보잘것없고 통제할 만한 재주가 아니라고 여겨 본도 우후 김성보가 현재 무관 가운데서 조금 나으므로 주상께 아뢰어 그를 보냈다.
차자를 올려 요동의 자문을 논하였고 겸해서 일의 마땅함을 진술하였다.
요동의 자문에는 중국 조정이 우리나라가 왜적과 더불어 동모(同謀)한다고 힐책하는 말이 있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아뢰었다.
“우리나라가 본래 도리를 잃어 병란을 초래한 일이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을 위하여 의리를 지켜 마음을 달리하지 아니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지신명이 진실로 내려다보신 바입니다. 오직 요즘의 인정이 응대하고 사명(辭命)하는 일에 있어서 일일이 말을 다하지 못하여 매양 가리어 숨기고 덮어 두려고만 하고 말하려 해도 다 못하게 되니, 우리나라의 본 실정이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중국 조정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처음부터 가상하게 여기거나 따뜻히 여기는 뜻이 없었고 도리어 허물을 독책하는 말만 있었습니다.”
이어 근래에 중원이 우리나라를 의심하는 일곱 가지를 자세하게 진술하여 해당 부서로 하여금 때에 맞게 속보하여 통절하고 명백히 하도록 청하였다.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전의 역사를 두루 보건대, 대개 장구하게 향유한 나라치고 중간에 쇠하였다가 다시 부흥해서 떨치지 않은 경우는 없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성상의 어진 사랑과 두터운 은택을 입었으니 어찌 한 번 미치광이 왜구에게 침입을 당했다고 해서 끝내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오직 성심을 굳게 정하시고 쇠함을 일으키고 난리를 안정시키는 처지에 상벌을 거듭 밝히고 사기를 진작시켜 죽음 가운데서 살길을 구하는 계책을 도모하소서.”
7월
먼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보내 일로(一路)의 군량미와 말꼴을 정돈하도록 계청하였다.
이때 명군이 장차 나오면 군량을 조달하는 일이 급하므로 선생은 여러 번 공문을 보내 신칙하였으나 인심이 아주 흩어져 수령들이 명령을 받아 시행하지 못하므로 때를 당해서 일을 그르칠까 염려하였다. 이에 선생은 스스로 검찰하여 신칙하고자 출행하려 하였으나 병이 심하여 자력으로 하지 못하자, 드디어 군량 공급과 일의 마땅함에 대하여 계청하였고 신경진으로 하여금 먼저 달려가서 정돈하도록 계청하였다.
7일(갑자) 연도의 군량 조달을 다스리기 위해 나가기를 자청하였다.
요동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리라는 보고가 먼저 이르렀다. 이때 선생은 치질이 매우 심하였다. 상께선 재상 윤두수에게 연도에 나가 군량 조달을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계(啓)하기를,
먼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보내 일로(一路)의 군량미와 말꼴을 정돈하도록 계청하였다.
이때 명군이 장차 나오면 군량을 조달하는 일이 급하므로 선생은 여러 번 공문을 보내 신칙하였으나 인심이 아주 흩어져 수령들이 명령을 받아 시행하지 못하므로 때를 당해서 일을 그르칠까 염려하였다. 이에 선생은 스스로 검찰하여 신칙하고자 출행하려 하였으나 병이 심하여 자력으로 하지 못하자, 드디어 군량 공급과 일의 마땅함에 대하여 계청하였고 신경진으로 하여금 먼저 달려가서 정돈하도록 계청하였다.
7일(갑자) 연도의 군량 조달을 다스리기 위해 나가기를 자청하였다.
요동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리라는 보고가 먼저 이르렀다. 이때 선생은 치질이 매우 심하였다. 상께선 재상 윤두수에게 연도에 나가 군량 조달을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계(啓)하기를,
“행재소에는 시임 대신(時任大臣)으로 단지 윤두수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니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병중이나 그래도 자력으로 나갈 만하옵니다.”
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선생은 병을 참고 행궁에 나가 하직 인사를 올렸다. 상이 인견하자 선생은 병으로 걷기가 힘들어 겨우 기어서 들어가 뵙고 한 길로 군량 조달하는 일을 진술하였다. 뵙고 나오자 상이 명하여 웅담과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저녁 무렵 소관역(所串驛)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졸(吏卒)들이 한 사람도 없으므로 촌락을 수색하여 몇 사람을 찾았다. 선생이 힘써 그들을 타이르고는 한 공책을 꺼내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고 보여 주며 말하기를,
저녁 무렵 소관역(所串驛)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졸(吏卒)들이 한 사람도 없으므로 촌락을 수색하여 몇 사람을 찾았다. 선생이 힘써 그들을 타이르고는 한 공책을 꺼내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고 보여 주며 말하기를,
“뒷날 이것으로써 논공행상할 것이니,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일이 안정된 뒤에 모두 벌을 받을 것이다.”
하자, 그후 오는 자들이 계속 줄을 이어 모두 공책에 서명되기를 원하였다. 선생이 인심을 수습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곧 공문을 각처로 띄워 고공책(攷空冊)을 비치하고 공로의 다소를 기록하여서 보고 시행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이에 명령을 들은 자들이 다투어 나와 시초(柴草)를 운반하고 방옥(房屋)을 가설하고 솥을 배설하니 며칠 사이에 모든 일이 말끔히 이루어졌다. 선생은 난리로 흩어진 백성들을 절박하게 독려함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지성으로 타이를 뿐 일찍이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않았다.
앞서 정주에 이르렀을 때 홍종록(洪宗祿)이 구성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미두(米豆)를 정주ㆍ가산에 운반해 놓은 것이 이미 2천 섬이 넘었다. 선생은 뒷날 안주가 후환이 될 것같이 생각하던 차, 마침 충청도 아산의 사창에서 세미를 싣고 행재소로 가는 배가 정주 입암(立巖)에 머물고 있었다. 선생이 매우 기뻐하고 곧 계를 올려 아뢰기를,
앞서 정주에 이르렀을 때 홍종록(洪宗祿)이 구성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미두(米豆)를 정주ㆍ가산에 운반해 놓은 것이 이미 2천 섬이 넘었다. 선생은 뒷날 안주가 후환이 될 것같이 생각하던 차, 마침 충청도 아산의 사창에서 세미를 싣고 행재소로 가는 배가 정주 입암(立巖)에 머물고 있었다. 선생이 매우 기뻐하고 곧 계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먼 곳으로부터 곡식 실은 배가 약속이나 한 듯이 이르니 하늘이 우리나라 중흥의 기운을 돕는 것 같습니다. 이 곡식을 취해서 군량에 보충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대정강(大定江)ㆍ청천강에 부교를 놓는 일을 독려하고 먼저 안주로 가서 이 일을 주선하였다.
19일(병자) 총병(摠兵) 조승훈이 평양으로 전진하여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후퇴하였다. 선생은 안주에 계속 머물러 인심을 진정시키고 뒤에 오는 명 나라 군사를 접대하겠다고 계청하였다.
조호익(曺好益)을 강동(江東)에 보내서 모병(募兵)하도록 하였다.
조호익은 전에 도사(都事)를 지낸 사람으로서 병사를 모집하여 행재소로 가는 중, 선생이 양책역(良策驛)에서 만나 그에게 말하기를,
또 대정강(大定江)ㆍ청천강에 부교를 놓는 일을 독려하고 먼저 안주로 가서 이 일을 주선하였다.
19일(병자) 총병(摠兵) 조승훈이 평양으로 전진하여 공격했으나, 불리하여 후퇴하였다. 선생은 안주에 계속 머물러 인심을 진정시키고 뒤에 오는 명 나라 군사를 접대하겠다고 계청하였다.
조호익(曺好益)을 강동(江東)에 보내서 모병(募兵)하도록 하였다.
조호익은 전에 도사(都事)를 지낸 사람으로서 병사를 모집하여 행재소로 가는 중, 선생이 양책역(良策驛)에서 만나 그에게 말하기를,
“명군이 장차 올 것이니 그대는 행재소로 가지 말고 강동에 돌아가 병사를 모집해서 명군과 더불어 평양에서 만나 군세를 돕는 것이 좋겠소.”
하자, 조호익이 이 말을 따랐다. 선생은 곧 그 사유를 임금에게 아뢰고 드디어 기병(起兵)하는 공문을 만들어 그에게 주고 또한 군기(軍器)를 도와주었다.
조호익이 가서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상원(祥原)에 출진해서 적과 싸워 많이 베고 얻었다.
경기 관찰사 심대(沈岱)가 선생을 방문하였다.
심대가 행재소로부터 부임하러 가는 길에 선생을 백상루(百祥樓)로 찾아와 뵈었다. 화제가 국난에 미치자 비분강개하여 몸소 적과 한바탕 싸우려고 하자 선생이 경계하여 말하였다.
조호익이 가서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상원(祥原)에 출진해서 적과 싸워 많이 베고 얻었다.
경기 관찰사 심대(沈岱)가 선생을 방문하였다.
심대가 행재소로부터 부임하러 가는 길에 선생을 백상루(百祥樓)로 찾아와 뵈었다. 화제가 국난에 미치자 비분강개하여 몸소 적과 한바탕 싸우려고 하자 선생이 경계하여 말하였다.
“그대는 서생으로서 전쟁터에 임하여 돌격하는 것은 그대의 장기가 아니다. 부하인 양주 목사 고언백(高彦伯)이란 자가 용감히 싸움을 잘하므로 그대는 다만 군병만 수습하고 실제 전투는 고언백이 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뒤에 들으니, 심대는 왜적을 겁내지 아니하고 매양 순행할 때마다 반드시 공문을 띄워 알리고, 평상시와 같이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적 있는 곳에 출입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거듭 글로써 경계하게 하였다. 그러나 심대는 그래도 변치 않고 그대로 하다가 과연 얼마 후에 적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
8월
안주에 계속 머물렀다.
선생은 총병 조승훈이 패하고 돌아간 뒤로는 밤낮으로 명군이 다시 나오기를 바라며 가을부터 겨울이 되기까지 항상 백상루에 거처하면서 남쪽으로 부모를 생각하고 북쪽으로 행재소를 바라보아 침식을 전폐하다시피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걱정했다.
9월
차자를 올려 건주 오랑캐가 들어와 구원하겠다는 것을 윤허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이때 건주위(建州衛) 오랑캐 여진이 우리나라가 왜적의 침범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구원하겠다고 장담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좇으면 끝내 나라의 화근이 될 것을 염려하여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였다.
8월
안주에 계속 머물렀다.
선생은 총병 조승훈이 패하고 돌아간 뒤로는 밤낮으로 명군이 다시 나오기를 바라며 가을부터 겨울이 되기까지 항상 백상루에 거처하면서 남쪽으로 부모를 생각하고 북쪽으로 행재소를 바라보아 침식을 전폐하다시피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걱정했다.
9월
차자를 올려 건주 오랑캐가 들어와 구원하겠다는 것을 윤허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이때 건주위(建州衛) 오랑캐 여진이 우리나라가 왜적의 침범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구원하겠다고 장담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좇으면 끝내 나라의 화근이 될 것을 염려하여 차자를 올려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였다.
“당 나라 때 안사의 난리(당 현종 때 안녹산ㆍ사사명의 난)에 회흘(回紇)ㆍ토번(吐蕃)에게 원병을 청하였다가 대대로 그 화를 입었습니다. 지금 우리 형세가 바야흐로 급해서 그들의 진퇴의 명을 뜻대로 견제할 수 없습니다. 설혹 많은 병사와 군마를 거느리고 강 건너편에 와서 주둔하고 이름만 구원이라고 하나 그 속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어떻게 그들의 대접을 감당하겠습니까. 변방의 장수로 하여금 좋은 말로 거절해서 그치게 하소서.”
11월
정주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시무를 진술하였다.
차자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정주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시무를 진술하였다.
차자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국사가 위급한 마당에 힘입을 것은 인심이니, 인심이 만약 해이해지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무릇 공에 대해 작위와 상을 즉시 내려 고인이 상을 시행하는 데 때를 넘지 않는다는 뜻에 응하소서. 또한 군민들이 적을 잡고 노획한 것은 곧 그 사람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적을 죽이는 일이 자신에게 이로운 일임을 알고 너도나도 일어나 적을 토멸하면 적세는 거의 쇠퇴해질 것입니다.
강원도 산속에서 사냥으로 생계를 삼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을 후한 상으로 불러 수풀 사이에 매복시켰다가 출몰해서 적을 죽이면 적이 왕래하는 북로(北路)는 수미(首尾)가 끊어져 동남의 형세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경성을 수복하는 계책은 마땅히 경기 일원을 삼도(三道)로 나누어 서로 형세를 이루어 앞뒤가 되게 하되, 적이 적으면 병사를 나누어 매복하게 하고 적이 많으면 병사를 합치어 공격하도록 하소서.
또한 호서ㆍ호남ㆍ관동 삼로의 군대가 서로 합세하여 앞에서 유인하기도 하고, 혹 뒤에서 추격하기도 하여 일심전력하여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면 적은 그물에 걸린 토끼와 같고, 경성에서도 반드시 내응해서 서로 죽이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영남 사람의 마음이 자못 분격하여 적을 토벌하려는 뜻을 갖고 있으나 군량과 백성들의 양식이 떨어지고 없습니다. 만약 영남의 좌도가 무너지면 우도도 지탱하지 못하고, 우도가 무너지면 호남과 호서가 차례로 침략을 받게 되어 팔도가 한곳도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호남의 농사가 대체로 풍년이 들었다 합니다. 호남의 곡식을 차츰차츰 영남으로 운반하소서. 그리고 별도로 곡식을 모으는 관리를 두어 급급하게 구분 처리하여 구렁에 떨어진 근심을 구한 뒤에야 남방이 보전될 수 있습니다.
사방 변방 보고에 일각을 기다려 지체하지 말고 처리하소서. 옛날 진(秦) 나라 때, ‘일을 아뢰고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 사마(司馬)의 문에서 사흘간 머물렀으나, 통보를 얻지 못하였는데, 당시의 식자들은 진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다.’ 합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금일 변방의 보고에 대해서는 즉시 시행하여 밤낮을 계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적은 살기등등해져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돌격 투쟁을 잘하는데 우리나라의 병사를 주관하는 장수들은 형세를 이롭도록 유도하지 못하고, 매양 오합지졸로서 약속된 날짜에 천천히 가, 요망(瞭望)도 자세히 하지 않고 척후도 멀리까지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의 간첩은 매우 많아서 우리의 동정을 저들이 먼저 압니다.
신의 생각으로선 날랜 군사들을 추려서 복색을 달리하여 멀고 가까운 지방에 흩어 놓아 적을 만날 때마다 공격하게 하고, 또한 일정한 거처 없이 움직이도록 하면 적은 우리 군사들의 많고 적음을 측량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성안에 기계를 설치하여 불을 지르고 겁탈하면 적은 반드시 당황하여 휴식하지 못해 그 형세가 크게 피곤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충분히 생각해 처리하시어 기회를 잃지 않으셔야 옳을 줄 압니다.”
강원도 산속에서 사냥으로 생계를 삼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을 후한 상으로 불러 수풀 사이에 매복시켰다가 출몰해서 적을 죽이면 적이 왕래하는 북로(北路)는 수미(首尾)가 끊어져 동남의 형세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경성을 수복하는 계책은 마땅히 경기 일원을 삼도(三道)로 나누어 서로 형세를 이루어 앞뒤가 되게 하되, 적이 적으면 병사를 나누어 매복하게 하고 적이 많으면 병사를 합치어 공격하도록 하소서.
또한 호서ㆍ호남ㆍ관동 삼로의 군대가 서로 합세하여 앞에서 유인하기도 하고, 혹 뒤에서 추격하기도 하여 일심전력하여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면 적은 그물에 걸린 토끼와 같고, 경성에서도 반드시 내응해서 서로 죽이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영남 사람의 마음이 자못 분격하여 적을 토벌하려는 뜻을 갖고 있으나 군량과 백성들의 양식이 떨어지고 없습니다. 만약 영남의 좌도가 무너지면 우도도 지탱하지 못하고, 우도가 무너지면 호남과 호서가 차례로 침략을 받게 되어 팔도가 한곳도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호남의 농사가 대체로 풍년이 들었다 합니다. 호남의 곡식을 차츰차츰 영남으로 운반하소서. 그리고 별도로 곡식을 모으는 관리를 두어 급급하게 구분 처리하여 구렁에 떨어진 근심을 구한 뒤에야 남방이 보전될 수 있습니다.
사방 변방 보고에 일각을 기다려 지체하지 말고 처리하소서. 옛날 진(秦) 나라 때, ‘일을 아뢰고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 사마(司馬)의 문에서 사흘간 머물렀으나, 통보를 얻지 못하였는데, 당시의 식자들은 진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다.’ 합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금일 변방의 보고에 대해서는 즉시 시행하여 밤낮을 계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적은 살기등등해져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돌격 투쟁을 잘하는데 우리나라의 병사를 주관하는 장수들은 형세를 이롭도록 유도하지 못하고, 매양 오합지졸로서 약속된 날짜에 천천히 가, 요망(瞭望)도 자세히 하지 않고 척후도 멀리까지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의 간첩은 매우 많아서 우리의 동정을 저들이 먼저 압니다.
신의 생각으로선 날랜 군사들을 추려서 복색을 달리하여 멀고 가까운 지방에 흩어 놓아 적을 만날 때마다 공격하게 하고, 또한 일정한 거처 없이 움직이도록 하면 적은 우리 군사들의 많고 적음을 측량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성안에 기계를 설치하여 불을 지르고 겁탈하면 적은 반드시 당황하여 휴식하지 못해 그 형세가 크게 피곤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충분히 생각해 처리하시어 기회를 잃지 않으셔야 옳을 줄 압니다.”
12월
평안도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적의 첩자 김순량(金順良)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이때 앞서 간특한 백성 김순량이 체부(體府)의 전령 및 비밀 공문을 가지고 적중에 들어가 보여 주었다. 적은 상금으로 소 한 마리를 그에게 주고는 계속 정탐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그를 사로잡아 엄히 문초하여 정보를 얻었다. 그와 같은 무리들로 적의 이목이 되어 각진에 흩어진 자가 40여 명이었으며, 우리나라의 기밀이 하나도 빠짐없이 제보되었다. 심지어는 산천의 형세, 도로의 곡직이며 우리 측의 행군 일자까지 적이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 선생이 크게 놀라 행재소에 급히 아뢰고, 또 명단을 모든 군진에 통보하여 잡게 하고 김순량을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이로부터 간사한 무리들은 흩어졌으니, 얼마 후 명군이 크게 출병하였으나 적은 알지 못했다.
사방에 공문을 띄워 각기 군대를 일으켜 달려오게 하였다.
공문이 이른 곳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너도나도 다투어 일어나 달려왔으며 승도들도 다 뭉쳐 적을 토벌하였다.
명장(名將) 제독 이여송이 4만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에 이르자, 선생이 영접하고 병란의 일을 논하였다.
제독이 선생을 맞이할 때 의자에 앉아 대면하였다. 선생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어 형세와 군사들의 진입로를 지시하자, 제독이 크게 기뻐하며 관심을 기울여 듣고 그곳마다 붉은 붓으로 표시를 하며 말하기를,
평안도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적의 첩자 김순량(金順良)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이때 앞서 간특한 백성 김순량이 체부(體府)의 전령 및 비밀 공문을 가지고 적중에 들어가 보여 주었다. 적은 상금으로 소 한 마리를 그에게 주고는 계속 정탐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그를 사로잡아 엄히 문초하여 정보를 얻었다. 그와 같은 무리들로 적의 이목이 되어 각진에 흩어진 자가 40여 명이었으며, 우리나라의 기밀이 하나도 빠짐없이 제보되었다. 심지어는 산천의 형세, 도로의 곡직이며 우리 측의 행군 일자까지 적이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 선생이 크게 놀라 행재소에 급히 아뢰고, 또 명단을 모든 군진에 통보하여 잡게 하고 김순량을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이로부터 간사한 무리들은 흩어졌으니, 얼마 후 명군이 크게 출병하였으나 적은 알지 못했다.
사방에 공문을 띄워 각기 군대를 일으켜 달려오게 하였다.
공문이 이른 곳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너도나도 다투어 일어나 달려왔으며 승도들도 다 뭉쳐 적을 토벌하였다.
명장(名將) 제독 이여송이 4만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에 이르자, 선생이 영접하고 병란의 일을 논하였다.
제독이 선생을 맞이할 때 의자에 앉아 대면하였다. 선생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어 형세와 군사들의 진입로를 지시하자, 제독이 크게 기뻐하며 관심을 기울여 듣고 그곳마다 붉은 붓으로 표시를 하며 말하기를,
“적이 내 눈에 환하게 보인다.”
하였다.
선생이 물러간 후 제독은 부채에다 시를 써서 보내왔다.
군사를 이끌고 밤새워 압록강을 건넌 것은 / 提兵星夜渡江干
삼한이 편안치 못하기 때문이라네 / 爲說三韓國未安
밝으신 임금께서는 날마다 전선의 소식 기다리는데 / 明主日懸㫌節報
미약한 신하는 밤새도록 술잔을 즐기네 / 微臣夜釋酒杯歡
살벌한 기운 도는 봄인데도 마음은 오히려 장쾌하니 / 春來殺氣心猶壯
이번에 요귀들 뼛속까지 서늘하리 / 此去妖氛骨已寒
감히 승산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 談笑敢言非勝算
꿈속에서 언제나 출정의 안장 타기를 생각하네 / 夢中常憶跨征鞍
선생이 물러간 후 제독은 부채에다 시를 써서 보내왔다.
군사를 이끌고 밤새워 압록강을 건넌 것은 / 提兵星夜渡江干
삼한이 편안치 못하기 때문이라네 / 爲說三韓國未安
밝으신 임금께서는 날마다 전선의 소식 기다리는데 / 明主日懸㫌節報
미약한 신하는 밤새도록 술잔을 즐기네 / 微臣夜釋酒杯歡
살벌한 기운 도는 봄인데도 마음은 오히려 장쾌하니 / 春來殺氣心猶壯
이번에 요귀들 뼛속까지 서늘하리 / 此去妖氛骨已寒
감히 승산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 談笑敢言非勝算
꿈속에서 언제나 출정의 안장 타기를 생각하네 / 夢中常憶跨征鞍
- [주-D001] 중궁(中宮)이 …… 아닌가 : 이때 왕비는 원자를 낳지 못하였으며,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인 임해군(臨海君)ㆍ광해군(光海君)이 있었다.
- 만력(萬曆) 21년 계사. 선생 52세 1월
1일(임술) 명군이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에 앞서 안주에 있던 선생은 대병이 장차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히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ㆍ김경로(金敬老)에게 격문을 보내어 연도에 병사를 매복시켜 놓았다가 적이 패주할 때 그 배후를 치도록 하였다.
이시언이 명령대로 중화(中和)에 이르렀으나, 김경로는 적과 접전을 꺼려 적이 퇴각하기 하루 앞서 재령(載寧)으로 도망쳤다. 적장 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현소(玄蘇)ㆍ평조신(平調信) 등이 싸우다 패하여 밤중에 달아났는데, 굶주려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추격하는 장병이 한 사람도 없었다. 명의 장수가 병사를 거두어 진격하지 않자, 이시언이 형세상 단독으로 감히 치지 못하고 다만 병들고 굶주려 낙오된 적병 60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선생이 김경로의 죄상을 행재에 아뢰어 참하려 했을 때 제독이 한 무사라도 아껴야 된다 하여 중지하였다.
평양으로부터 동로(東路)로 나가 연도의 군량을 조달하였다.
제독이 평양을 탈환한 뒤에 적을 추격하기 위하여 도성으로 육박하려 할 때에 선생에게 말하기를,“들으니 앞 길에 군량과 말꼴이 떨어졌다고 하니 상공은 마땅히 먼저 가서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시오.”하였다. 적병이 새로 퇴각하는 일원에 사람과 물자가 텅 비어 군량을 조달할 계책이 없었다. 선생은 급히 황주로 달려가 황해 감사 유영경(柳永慶)에게 이문을 보내 군량과 말꼴을 운반하도록 하였고, 또한 평안 감사 이원익에게 각 진중에서 싸우기 힘든 자들을 뽑아 평양으로부터 군영 앞에까지 수송하도록 하였으며, 그리고 평안도 삼현(三縣)의 곡식을 선박으로 힘을 다해 운반하여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 이때 대군이 임진 나루에 이르고 있었으나 강물의 얼음이 녹아 건널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선생이 칡을 꼬아 큰 밧줄을 만들게 하고, 또 강의 남북쪽 언덕에 각기 기둥 2개씩을 마주 세우도록 하였다. 그 두 기둥 사이에 한 통나무를 눕혀 끼우게 하고는 큰 밧줄을 끌어다가 강을 지나 양쪽 기둥 사이에 끼인 통나무에 매게 하고, 천여 명의 사람들이 각각 짧은 통나무를 가지고 밧줄 꼰 틈에 끼워 몇 바퀴 돌려서 다른 밧줄에 끼워 넣게 하여 서로 버티게 하니 엄연히 다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그 위에 갈대와 실버들을 깔고 흙으로 덮게 하였다. 천병이 보고 크게 기뻐하며 다리 위를 말 채찍질하면서 통과하였고 화포와 병기가 모두 이 다리를 이용하여 건넜다.
호서ㆍ호남ㆍ영남 삼도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제독 이여송이 벽제에서 패하고 서로(西路)로 돌아가려 하자 선생이 극력으로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대군이 개성부 서로(西路)로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을 때, 적병은 모두 경성에 모여 왕사(王師)를 막아 낼 모의를 하고 있었다. 선생이 거듭 제독에게 진격을 독려하도록 청하였으나 여러 날 지체하고 있었다.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벽제역에서 적과 싸워 베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이에 가정(家丁) 천여 명과 더불어 달려가 싸웠으나 패하여 파주로 귀환했다. 그 다음날 동파로 퇴각하려 할 때 선생이 극력으로 주장하기를,“승부는 병가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당연히 형세를 보아 다시 진격하실 일인데, 어찌 경솔히 움직이려 하십니까.”하였으나, 제독이 듣지 않았다. 이날 삼영(三營)이 임진 나루를 건너 돌아왔다.
그 다음날 동파역에서 다시 개성으로 퇴각하려 했다. 선생이 또 극력 만류하기를,“대군이 한번 퇴각하면 적의 기세가 더욱 교만해지고,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면 임진 이북도 보전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조금 머물러 틈을 엿보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하였다. 제독이 거짓으로 허락하자, 선생이 물러갔다. 뒤에 제독은 곧 개성으로 돌아가고 모든 진영도 돌아갔다.
선생은 혼자 동파에 머물며 사람을 보내어 다시 병사의 진군을 청하였다. 얼마 후에 제독이 큰소리로 말하기를,“청정(淸正)이 함경도로부터 돌아와 평양을 엄습한다 하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하고 드디어 평양으로 회군하였다. 선생이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을 시켜 제독을 달려가 뵙고 군사를 물리는 데 다섯 가지 불가(不可)함이 있음을 진술하였으나, 제독은 잠잠히 듣기만 하고 퇴군하였다.
권율과 이빈의 군사를 합쳐 파주산성을 지키도록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지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처음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윽고 적병이 반드시 보복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임진으로 물러나 있었다. 선생이 급히 단기로 파주산성에 달려와 지형 사정을 살펴 큰 길목인 데다가 지형이 높은 절벽이 되어 버틸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권율과 순변사 이빈으로 하여금 군사를 합쳐 거점을 삼아 적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막게 하고, 또 방어사 고언백ㆍ이시언, 조방장 정희현ㆍ박명현(朴名賢)으로 좌익을 삼아 해유령(蠏踰嶺)을 막도록 하며, 의병장 박유인(朴惟仁)ㆍ윤선정(尹先正)ㆍ이산휘(李山輝) 등으로 우익을 삼아 창릉(昌陵)ㆍ경릉(敬陵) 사이에 매복하였다가 출몰하며 쳐서 적으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무하러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추의사(秋義使) 우성전(禹性傳), 경기 수사 이빈(李蘋), 충청 수사 정걸(丁傑) 등을 수군으로서 서강에 주둔하게 하여 적의 세력을 나누고, 충청 순찰사 허욱(許頊)을 본도로 돌아와 지키도록 하고, 경기 이남 각도의 관병ㆍ의병들에게 이문을 띄워 좌우로 적의 퇴로를 막아 끊게 하며, 양근 군수(楊根郡守) 이여양(李汝讓)으로 하여금 용진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후 적은 권율이 파주에 있음을 알고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려 했으나, 성이 험준한 것을 보고는 범하지 못하였다.
총병 사대수가 적을 피하여 개성으로 가기를 원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때 적이 사방으로 나와 죽이고 노략질을 하였다. 어떤 정탐군이 총병 사대수에게 보고하기를,“사 총병과 유 체찰(柳體察)을 잡으려 합니다.”하니, 사 총병이 곧 선생에게 보고하여 함께 개성으로 가서 피신하자고 했다. 이에 선생이 대답하기를,“적들은 방금 대군이 근처에 주둔하였는가 의심하니, 어찌 감히 경솔하게 침범할 수 있으리오. 우리들이 한번 경솔하게 움직이면 반드시 민심이 동요될 것이니, 가만히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하였다. 사대수가 웃으면서 말하기를,“체찰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령 적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와 체찰은 사생을 같이 할 것이니, 어찌 감히 나만이 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자기 휘하의 용사 수십 명을 파견하여 호위하려다가, 뒤에 적이 성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 선생이 오래도록 동파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에는 전쟁을 치른 뒤라서 마을은 다 폐허가 되어 머무를 곳이 없었다. 이에 풀을 베어 막사를 만들고 여러 달 그곳에서 유숙하니, 옷과 금침이 풀빛으로 물들었다.
유격장군 왕필적(王必迪)에게 글을 보내 앞으로 취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적이 이제 험한 곳에 웅거해 있어서 쉽사리 공격할 수 없으니, 대병은 의당 동파와 파주에 진주하여 그 뒤를 추격하고, 강남 병사 1만 명을 선발하여 강화로부터 한남(漢南)으로 나가 적이 뜻하지 아니한 틈을 타 모두 주둔지를 격파하면 경성의 적이 돌아갈 길이 단절되어 반드시 용진을 향하여 도망할 것이다. 이때에 후방의 군사로 강나루까지 추격하면 단 한 번에 적을 소탕할 수 있다.”왕필적이 서신을 보고 무릎을 치며 기이한 계책이라고 칭찬하고, 곧 정탐병을 선발하여 충청도에 가서 적의 형세를 살펴보게 했다. 그때에 적의 정예병은 다 경성에 있고, 후방 주둔 부대는 다 파리하고 피로하며 적고 약하였다. 정탐갔던 병졸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1만 명의 군대도 필요치 않고 단지 2, 3천 명이면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독(이여송(李如松))은 북방의 장수이므로 강남의 군대가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 허락하지 않았다.
호남에서 모은 곡식으로 주린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당시에 적이 경성에 웅거한 지 2년이 되어 백성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거의 다 굶주려 죽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선생이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찾아왔다. 선생은 전 군수인 남궁제(南宮悌)로 감진관(監賑官)을 삼아 여러 방면으로 구제하였다. 마침 호남에서 수집한 곡식 1천 석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선생이 매우 기뻐서 일면으로 급히 장계를 올리고 곧 남궁제에게 분부하여 송엽설(松葉屑)을 혼합하여 구제하게 하니, 완전히 살아난 백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영남에서도 굶주림을 보고하니 곧 체찰부사(體察副使) 김찬(金瓚)에게 이문을 보내 남원 등의 창고에 저장된 곡식 1만 석을 방출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적중에서 보내온 왕자의 서신과 삼로신(三虜臣)의 서신을 얻어 급히 장계를 올려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처음에 황정욱(黃廷彧)이 그 아들 혁(赫)과 이영(李瑛)과 함께 두 왕자를 시종하여 북도(北道)에 갔다가 적에 잡히게 되었다. 이때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부하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자가 적진 속에 들어갔다 돌아올 때 두 왕자의 답서와 언문으로 된 서신을 가지고 왔다. 또 행재소에 올리는 장지(長紙)로 된 봉서(封書)도 있었다. 김천일이 펴 보니 삼로신이 연명한 서신이나 말이 매우 두서가 없으므로 급히 선생에게 보고했다. 선생은 천일(千鎰)의 첩보에 의거하여 급히 장계를 올려 그 상황을 말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소위 왕자서(王子書) 일봉(一封)은 그대로 올려 보냅니다. 삼로신의 서신은 겉봉에 ‘행재소에서 펴 보시라’고 썼으며, 서신 안팎에 모두 ‘신(臣)’이라는 글자가 없고, 단지 ‘장계군(長溪君)ㆍ남병사(南兵使)ㆍ행호군(行護軍)’이라고 칭하여 각자 서명하였는데 해괴한 말이 많습니다. 이는 반드시 적장이 협박하여 시킨 일이니, 아주 원통합니다. 그러므로 원래의 글은 감히 올리지 못하오나, 그사이의 사정은 조정에서 몰라서는 안 될 일이기에 하나같이 그 모양대로 등사하여 올려 보내며, 언문으로 된 서신은 오지 않았으므로 이문으로 물어보았습니다.”○ 김천일이 보낸 첩보 말단에,“이신충이 적진으로부터 두 왕자의 답서와 언문으로 된 서신을 가지고 왔다.”하였고, 또,“행재소에 올린 바, ‘신’이라는 글자가 없는 장지로 된 봉서를 펴 보니, 삼로신이 연명한 서신인데 해괴한 말이 많아 통분하기 그지없어 의당 불태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뜯어보았으므로 버릴 수도 없기에, 왕자의 답서와 함께 올려 보냅니다.”하였다. 또 김천일이 이 사실을 모두 진술하여 직접 행재소에 계달하였는데 첩보의 전문 및 장계는 《징비록(懲毖錄)》에 나타나 있다.
○ 그 뒤에 황정욱이 적진으로부터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그를 잡아다 논죄하였다. 선생은 황정욱이 비록 죄가 있으나, 공신의 자손이니 고문하여 죽일 수 없다고 하여 우의정 정탁(鄭琢)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구제하였다. 그래서 황정욱은 죽음을 면하고 귀양을 갔다.
4월
제독 이여송에게 글을 보내 화친이 부당한 계책임을 주장하였다.
이때 적이 글을 보내 제독에게 화친하기를 요구하니, 제독이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적중에 들어가 왕자와 배신(陪臣)들을 돌려보내고 적병을 부산으로 후퇴시킨 후에야 화천을 허락할 것이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제독이 군대를 인솔하여 개성으로 돌아오자, 선생이 글을 보내 화친의 잘못을 극력 주장하였다. 제독은 문서를 내려 보여 주었는데,“이런 말은 나의 마음과 같은 생각이지만 실은 들을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유격 진홍모(陳弘謨)를 적진에 보냈는데, 선생과 진홍모는 파주에서 마주쳤다. 진홍모가 선생에게 기패(旗牌 기(旗)는 명 나라의 국기이며, 패(牌)는 천자의 방문(榜文))에 참배하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이는 왜군 진영으로 가는 기패인데 내가 무슨 이유로 참배하겠는가. 또한 적을 살해하지 말라는 송 시랑(宋侍郞)의 패문(牌文)이 있으니 더욱 참배하라는 말을 들을 수 없다.”하였다. 진홍모가 3, 4번 강요하였으나 선생은 복종하지 않았다. 제독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기패는 바로 황제의 명령이거늘, 어찌 참배하지 않는가. 내가 군법을 시행하고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가야겠다.”하였다. 그 이튿날 선생이 원수 김명원과 군문에 나가 만나 보기를 청하니, 제독은 노하여 접견하지 않았다. 김 원수가 물러가자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제독이 우리를 시험해 보려 함이니 아직 기다려 보자.”하였다. 때마침 비가 조금씩 왔는데 선생은 김 원수와 함께 문밖에 서 있었다. 얼마 있다가 제독이 사람을 시켜 두 번 엿보고는 들어오라고 하였다. 선생이 앞에 나가 사과하며,“저 같은 소인이 비록 어리석고 용렬하나 어찌 기패에 대해 존경할 줄을 모르겠습니까마는 그 패문에는 우리 국민이 적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사적으로 통분하여 감히 참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제독이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당신 말이 매우 옳습니다. 패문은 사실 송 시랑의 명령이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하였다.
이로부터 제독이 연달아 사람을 보내 왜적의 진중에 왕래하게 하였다. 어느 날 제독의 가정(家丁)이 보고하기를,“유 체찰이 화친하기를 싫어하여 임진강 나루에 배를 모두 없애 버려 왜군 진영에 사자를 통행하지 못하게 합니다.”하니, 제독이 매우 노여워하며 선생을 납치하여 곤욕을 가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임진강에 배가 있어 왕래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사람을 시켜 선생을 납치할 것을 중지시켰다. 대체로 제독은 선생이 화친하기를 싫어하므로 평소부터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남의 말만 듣고는 다시 살펴보지도 아니하고 갑자기 이처럼 노여워하니,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위하며 염려하였다.
○ 그후에 제독이 다시 유격 척금(戚金)과 전세정(錢世禎)을 시켜 동파에 가서 화친의 편리함을 극언하여 “지금 한 번 화친을 허락하면 왕자도 돌아오고 경성도 회복될 것”이라고 하며 여러 번 그런 말을 하였으나, 선생은 더욱 강력하게 거절했다. 전세정이 노하여, “그렇다면 당신의 국왕은 어찌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느냐.” 하니 선생이 천천히 말하기를, “수도를 옮겨 보존하기를 도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했다. 전세정 등이 돌아가자, 선생은 다시 서신을 보냈다.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적이 감언이설로 우리를 유혹하여 재삼 서신을 보내왔으나 아직 화친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천하의 대의를 위하여 차라리 죽더라도 욕이 되지 않으려는 데 불과할 뿐이다. 이제 종묘는 불타 버렸고, 왕릉은 파헤쳐졌으니, 온 나라 신민들은 모두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될 것이다. 수치를 안고 원한을 풀어 적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을 공격하다가 노야의 법에 저촉되어 죽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물며 과군(寡君)이 종사의 대의를 위하여 사랑과 애정을 참으면서 화친을 통렬히 배척하였는데, 배신으로 몸을 바쳐 죽음으로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또 어떻게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적을 죽이지 말라고 하겠는가.”한음(漢陰) 이덕형의 수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공(公)은 매번 제독에게 글을 보낼 적에 고금을 드나들며 의리를 인용하여 수천백 언(數千百言)은 붓을 잡으면 곧 완성하였다. 제독이 그 말을 들어 쓰지는 않았으나, 그의 재주와 식견에 깊이 탄복하였으며, 또한 ‘유모(柳某)는 근심하는 빛이 안면에 넘쳐흐르니 정말 지성으로 국가를 위하는 자이다.’ 하였다.”총병 오유충(吳惟忠)과 유격 척금(戚金)도 사람에게 말하기를,“류 풍원(柳豐原)은 조선의 어진 재상이다.”하였고, 참모 여응종(呂應鍾)의 《조선기(朝鮮記)》에도 선생의 충성심과 기개를 칭찬하였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적에게 파헤쳐졌음을 듣고 여러 재상들과 만월대(滿月臺)에 올라 망곡(望哭)하고, 군관 이홍국(李弘國) 등을 보내 두 능을 살피게 하였다.
또한 박유인(朴惟仁) 등을 보내 정릉에서 얻은 시체를 수레로 실어 송산리(松山里)에 이장하게 하고 급히 장계를 올려 사실을 아뢰었다.
20일(갑진) 명 나라 군대를 따라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적병은 금방 후퇴하였으나 불태우고 죽이고 노략질한 나머지 성안의 가옥 및 백성과 물자가 백에 하나도 보존되지 못하였으며, 쓰러진 시체가 서로 포개어져 있었다. 선생은 먼저 종묘에 나가 통곡하고, 다음에 제독에게 문안하면서 다시 군대를 급히 보내 적을 추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제독은 한강에 배가 없음을 핑계 삼았다.
선생이 이보다 앞서 경기 좌감사 성영(成泳)과 수사 이빈(李蘋)에게 적이 후퇴하는 즉시 한강에 있는 배를 모집하라고 하였는데, 때마침 한강에 도착한 배가 80여 척이 되었다. 선생이 보고하니, 제독이 영장(營將) 이여백을 파견했다. 그런데 이여백은 군사 만여 명을 인솔하고 한강을 반쯤 건넜을 때 갑자기 발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돌아왔다. 대개 제독은 참으로 적을 추격할 의사가 없으므로 단지 기만하는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 처음에 선생이 모든 장수에게 분부하여 적을 추격하게 하였다. 고언백(高彦伯), 이시언(李時言), 김응서(金應瑞) 등은 동쪽 길을 따라 강을 건너 이천 부사 변응성(邊應星)과 합세하게 하고, 이빈, 권율 등은 서쪽 길을 따라 강을 건너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경기 좌도의 관군ㆍ의병과 힘을 합하여 좌우에서 습격하게 하였으며, 군관 이충(李忠)으로 한 부대를 인솔하여 죽산 지방에 매복하게 하였고, 또 양호와 영남의 모든 고을에 통문(通文)을 돌려 서로 약속하여 곳곳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얼마 후에 명장(明將) 이여송은 도리어 우리 군대를 백방으로 저지하고 교란하여 이빈 등 여러 장수들을 구금하였다. 다만 이시언, 정희현(鄭希賢), 변응성 등은 샛길을 따라 나머지 적을 공격하여 참살하였다.
○ 선생은 남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 하여 밤낮으로 주선하며 최선을 다해 구제하였고, 또 모든 장수를 시켜 시체를 모아 성 밖에 쌓도록 하였다. 또한 부서를 설치하고 서적 수만 권을 수집하여 정자 윤경립(尹敬立)에게 관장케 하였던바, 그후에 홍문관에 소장된 서적은 거의 다 그 시기에 모은 것이었다. 여러 곳에서 유랑하던 조정의 관료와 선비들이 사방에서 계속하여 모여드니 그의 재주에 따라 임시로 각기 부서를 맡게 하고, 나머지도 다 구제하여 그들이 적당한 자리를 얻게 하였다. 처음 입경하였을 때에는 잿더미만 눈에 가득 찬 빈 성이었는데, 열흘이 지나 한 달 사이에 방편을 지도해 주어 모든 일이 비로소 두서가 있게 되었다.
23일(정미) 병이 나서 치료하였다.
증세가 매우 위중하므로 명조의 장사들도 와서 보는 자들은 다 근심하는 빛이 있어 계속 문병하였는데, 6월에야 비로소 병석에서 일어났다.
참장 낙상지(駱尙志)가 와서 문병하고 군대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6월
18일(신축) 모든 대신ㆍ재신(宰臣)과 함께 정릉에서 얻은 시체를 가 보고 의논을 올린 바 있다. 장계를 올려 정예병을 선택하여 훗날에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적이 후퇴한 뒤에 동래와 부산 사이에 웅거하며 토굴을 파고 살면서 자유로이 노략질을 하였다. 명 나라 병사가 사방을 포위하였으나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제독 이하의 모든 장수가 차례로 철수하니, 선생은 명 장수들의 철수를 여러 차례 간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장계를 올려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적이 후퇴할 즈음에 급히 정병을 선발하여 많은 방략을 쓴 뒤에 적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신이 경기 여러 고을의 군대를 살펴보니 여러 해를 적과 싸웠으므로 마음과 담력이 이미 단단하여 전쟁할 때마다 먼저 앞장섰고, 추의와 창의와 같은 군대는 비록 오합지졸이지만, 열 가운데 한 명만 취한다면 어찌 쓸 만한 자가 없겠습니까. 이로 미루어 본다면 삼남 지방에는 쓸 만한 자가 더욱 많을 것입니다. 강원도 산간에는 사냥으로 생활을 영위하며 맹수를 때려잡고 주리고 목말라도 지치지 아니하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의당 곳곳에서 그런 자를 선출하여 궁시와 전마와 양식을 도와주며 장수들에게 분배하여 항상 훈련하게 하고, 또한 각 고을 수령에게 명하여 자기 경내에 정예병을 가려 난잡하지 못하게 하여 한곳에서 변란이 발생하면 서로서로 응원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군졸이 잘 훈련되어 전쟁에 임하여 적의 소문만 듣고 흩어져 도망가는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적이 믿는 것은 조총뿐이니, 우리나라도 밤낮으로 훈련하여 군사들에게 배워 익히게 하면 적의 기술을 우리도 겸할 수 있습니다.”또다시 장계를 올려 군대를 훈련시키게 하고 절강의 병기를 모방하여 화포와 모든 기구를 제조하여 급한 시기에 사용할 것을 준비하도록 청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낙 참장(駱參將)이 일찍이 신과 말하였습니다. ‘강남 군사가 돌아가기 전에 화포, 낭선(筤筅), 창검, 조총 등의 기술을 습득시켜 한 사람이 열 사람을 가르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을 가르치면 수년 후에는 정병 수만 명을 얻을 것이니, 적이 공격하여 오더라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남쪽 지방의 방어 계책은 낙 참장의 말과 같이 한 후라야 거의 만분의 하나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조총, 호준포(虎蹲炮), 화전(火箭), 화륜포(火輪炮) 등의 기계류는 모두 전쟁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신의 생각으로 이런 기능공을 각 지방 재력이 충분한 곳에 보내 장인을 많이 모아 밤낮으로 병기를 제조하도록 하고, 그중에서 용기 있고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연습하게 하여 진을 치고 성을 지키는 법과 기치(旗幟)의 빛을 절강(浙江) 군대의 모양같이 하여 적들을 두렵게 하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처음 선생이 성에 들어가 성안의 장정 70여 명을 선발하여 군관 두 사람으로 나누어 거느리게 하여 낙 참장에게 보내 화포, 창검, 조총, 낭선 등의 기술을 배우기를 요청하였다. 낙공(駱公)이 자기 영중(營中) 강남 장교 10명을 시켜 나누어 가르치게 하고, 혹은 자기가 친히 현장에 와서 직접 검술과 창술을 매우 열심히 가르쳤다.
낙공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선생이 교사를 남겨 두기를 요청하였다. 낙공은 그를 위하여 문유(聞愈)와 노성(魯姓) 두 사람을 국도에 머물러 있게 하여 2년을 밤낮으로 훈련하여 거의 모두 인재가 완성되었고, 또 진 치는 법도 가르쳤다.
20일(계묘) 임금의 명을 받고 영남에 내려가다 안동에 계신 대부인에게 문안드리고 곧 하도(下道)로 향하였다.
처음에 겸암공이 대부인을 모시고 난을 피하여 관동으로부터 전전하다 태백산 아래 이르렀다. 이때 와서 처음으로 인편과 길이 통하여 선생이 찾아가 문안드리니,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고 가슴이 북받치어 말을 하지 못하였다. 물러나 겸암공과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때마침 선생은 겨우 큰 병을 다스렸다가 다시 학질을 여러 날 앓아 매우 피곤하고 지쳤는데도, 명장(明將)이 이미 남쪽으로 내려갔고 또 적이 진주(晉州)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앓으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총병 유정에게 글을 보내 진주를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에 진주가 적에게 포위당한 지 여러 날 되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유 총병이 군대를 가까운 곳에 주둔시키고 진격하지 않자, 선생이 여러 차례 글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선생이 성주에 도착하여 진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고령(高靈)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적은 이미 초계(草溪)로 쳐들어오니, 고령과의 상호 거리가 30리였다.
선생이 장병을 소집하여 힘을 다하여 경상 우도의 여러 고을 중 적에게 함락되지 아니한 곳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얼마 후 유 총병과 오 유격이 합천에서 회합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8월
상의 부름을 받아 원주에 갔다가 다시 명에 따라 남하하였다.
처음에 선생이 부름을 받았을 적에 본도에 적의 형세가 마침 치열하였는데 우리나라 장수는 한 사람도 도내에 없었다. 장계를 올려 상황을 아뢰고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군대의 일을 보살피기를 요청하였다.
얼마 안 되어 원수가 합천에 도착하자, 상의 부름에 따라 원주에 도착하였다. 다시 본도에 머물러 여러 장수와 약속하라는 명령이 있어 원주에서 영남으로 돌아갔다.
충주에 도착하여 장계를 올려 소금을 구워 주린 백성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신이 이번 길에 경유한 여러 고을은 한결같이 폐허가 되었으나, 그 가운데 충주는 적이 오래 주둔한 곳이고 또 명군이 왕래할 적에 경유한 곳이므로 피해가 더욱 심하여 혈혈단신으로 남은 백성이 며칠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니, 극도로 애통한 일입니다. 도내 여러 고을의 식량 창고가 이미 모두 비어서 서로 옮겨 구제할 계책도 없고, 단지 소금 굽는 일만이 시행하여 봄 직합니다.
신이 듣건대, 황해도의 풍천ㆍ옹진ㆍ장연 3읍에 소속된 3, 4개의 섬이 있는데 그 섬에 잡목이 많다고 합니다. 염호(鹽戶)를 소집하여 소금을 생산하게 한다면 한 달 안으로 수만 석의 소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배로 운반하여 양호 지방의 해변에 농사가 조금 잘된 곳에 나눠 주어 곡식과 교환하여 경성에 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또 개성 등에 분배하여 봄과 가을에 종자를 삼으면 그 이로움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이제 충주 등을 살펴보니, 지방이 바다와 멀어서 소금이 귀하기가 금과 같으니, 궁한 백성들이 초근목피는 채취하였으나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이런 시기에 천여 석의 소금을 충주에 수송하여 인근의 여러 고을에 나눠 주면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날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경기도에 소속된 여러 섬에도 의당 별도의 방편을 취하여 그로 하여금 일체 경리하게 하소서.
지금 전쟁이 그치지 않아 군수품은 바야흐로 급한 처지라 백만의 생명이 학철지어(涸轍之魚)의 형세입니다. 모름지기 밤낮으로 대책을 강구하여 병력을 조달하고 적을 방어하는 일 이외에는 더욱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급급하여야 합니다. 신이 전에 안주에 있을 때에 섬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권장하였고, 동파에 있을 당시에도 강화 등의 백성들에게 경작을 권하여 곡식을 생산하는 길을 넓혔습니다. 이와 같이 시행하여 다행히 풍년을 만나면 백성의 생명도 구제할 수 있고, 점점 곡식을 저축하는 계책도 될 것입니다. 만일 서울 가까운 여러 섬에 곡물이 풍족하게 되면 관청이나 사가가 모두 도움이 됩니다. 비록 뜻밖의 변란이 발생하더라도 섬 안의 곡식을 가져다가 사용하기가 바깥 창고에 쌓인 물건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이때에 굶주림이 점점 심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며 공사 간에 저축된 곡식은 탕진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계책이 없었다. 선생이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부역을 경감하여 백성을 보호할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또 요동에 자문을 보내 중강진에 시장을 개설하여 무역하기를 요청하니, 중국의 변방 관리들도 우리나라 사정을 알고 황제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이에 요동의 곡식이 많이 흘러나와 개성의 서쪽 지방이 먼저 이로움을 보았고, 경성의 백성들도 뱃길로 서로 유통함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장계를 올려 직명(職名)을 삭제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선생이 병중에 열심히 이리저리 뛰어다녀 증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국사는 바야흐로 위급한데 분주하게 다니며 처리할 수 없으므로 장계를 올려 파면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격 오유충(吳惟忠)의 서신에 회답하여 적을 방어할 형세를 논하였다.
이때에 오 유격이 상주에 있으면서 선생에게 서신을 보내 험한 곳에 설비를 갖추어 적을 방어할 것을 언급하였다. 선생은 답서하여 영남의 형세를 갖추어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지금 적이 명 나라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부산 한 모퉁이에 주둔하고 감히 움직이지 못합니다. 만일 대군이 대구 등에 주둔하여서 동쪽 변방에 돌진하려는 형세를 막고, 또 낙 참장과 모든 장수에게 연락하여 의령과 고성의 경계에 주둔하여 서쪽 길을 가로막고, 인하여 우리나라의 수군 장수 이순신 등과 약속하여 전함을 모두 인솔하여 거제도의 근해에서 가로막고 세 곳에서 합세하여 공격하면, 적의 앞뒤가 다 위협을 받게 되어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적들이 머뭇거리다가 달아날 것입니다.”장계를 올려 역관을 보내 명 나라 군사가 방출하는 식량을 조사하고, 또한 삼남 지방의 노비들이 세금으로 바친 포목을 풀어 명 나라 군사의 의복을 장만할 자료로 삼을 것을 청하고, 또 중신들을 급히 파견하여 식량을 마련 운반할 것을 요청하였다.
도원수에게 영을 전하여 군율을 거듭 엄하게 하여 군중의 심리를 정숙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장흥 부사 유희선(柳希先)이 섬진강을 지키다가 진주성이 함락됐다는 말을 듣고, 광양ㆍ순천 지역으로 도망치면서 적이 쳐들어온다고 크게 외쳤다. 두 고을 백성들이 일시에 흩어졌고, 난민이 그 틈을 타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창고에 곡식이 탕진하여 남은 게 없으며, 인근의 여러 고을들도 모두 소동이 일어났다.
선생이 도원수에게 이문을 보내어 유희선을 참형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엄중히 경계하도록 하였다.
9월
상의 부름을 받아 행재소로 돌아왔다.
10월
상을 모시고 환도하여 훈련도감의 설치를 청하였다.
이때에 전란을 치른 뒤에다가 거듭 흉년이 들어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자, 선생이 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켜 서울을 호위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선생을 제조(提調)로 삼으니, 선생이 당속미(唐粟米 중국에서 들어온 곡식) 1만 석을 방출하여 식량으로 분배할 것을 요청하고 사람을 모집하는데 날마다 백미 2승(升)을 주었다. 이에 응모자가 구름같이 모이자, 건장한 사람 수천 명을 얻어서 조총과 창검의 기술을 가르쳤으며,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을 세워 통솔하게 하고 순번을 정하여 숙직하게 하였다. 상의 행차가 있을 적마다 이 군졸을 동원하여 호위하게 하니,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계사로 변응성을 경기 좌방어사로 임명하여 용진에 주둔시키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양주의 도적 이능수(李能水)와 이천의 도적 현몽(玄夢)이 혼란한 틈을 타 일어나고, 호서에서도 뭇 도적이 곳곳에서 벌 떼처럼 일어나 행인을 노략질하니 도로가 불통되었다.
마침 황해도 승군 백여 명이 훈련도감에 찾아왔다. 선생은 상에게 청하여 경기 좌방어사 변응성(邊應星)으로 그들을 거느리고 용진에 주둔하게 하니, 이로부터 동쪽 길이 통하게 되었으며 도적들도 차차 없어지게 되었다.
얼마 후에 비변사에서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도적 가운데서 그들끼리 서로 잡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면제하고 상도 줄 것이라 하였다. 도적들이 그 소문을 듣고 이능수를 목 베어 와서 항복하자, 현몽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총병 척금을 만나 군대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윤11월
백관이 연명(連名)하여 명 나라 사신 사헌(司憲)에게 글을 보냈다.
이에 앞서 명 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쇠약하여 다시는 복구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의론이 분분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위학증(魏學曾)의 주본에, ‘분할역치(分割易置)’라는 말이 있었다.
그 의론이 아래로 내려오자, 병부 상서 석성(石星)만이 굳이 옳지 않다고 하여, 사헌을 보내 칙령을 받들어 선유(宣諭)하도록 하고 겸하여 나라 사정도 시찰하게 하였다.
이때에 요동에 있던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접반사(接伴使) 윤근수(尹根壽)에게 차부(箚付)를 주고 우리나라 대신에게 전달하라 하였다. 윤근수는 돌아와 선생을 사저에서 만나 보고 손으로 책상을 밀치며 재삼 울부짖으며 말하기를,“송 시랑(宋侍郞)이 여러 조신(朝臣)에게 보낸 차부(箚付)가 있는데 살펴보지 않으니, 공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하였다. 선생은 대답하기를,“차부의 내용은 우리나라 배신(陪臣)이 참여할 성질의 것도 아니며, 공이 직접 가지고 올 일도 아니오.”하였다.
다음날 윤근수가 다시 차부를 비변사에 접수시키자, 선생은 물리쳐 받지 않고 말하였다.“경략이 국사를 공적으로 의논하려 한다면 의당 자문으로 우리 임금께 아뢸 것이어늘, 이제 자문은 없고 단지 차부만 있소. 그 내용은 나의 생각으로 추측할 수도 없으며, 만일 보고도 조치할 수 없는 일이면,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타당하오.”이날 상은 선생을 인견하고, 윤근수가 올린 위학증의 주본을 보여 주며,“내가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왕위를 물러나 피하려 하였더니, 이제 과연 그렇다.”라고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명 나라가 이 같은 망녕된 논란에 어찌 흔들리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아무 염려 마시고 의당 우리의 할 일만을 다하여 중국의 우려를 풀 뿐입니다.”하였다.
얼마 후에 명의 사신 사헌이 당도하자, 선생이 벽제역에서 영접하였다. 사헌이 선생을 맞아들여 다정하게 이야기하다가 또 말하기를,“내가 서울에 도착하면 새로운 조치가 있을 것이오.”하니, 선생은 비록 감히 내용을 묻지도 못하였지만 마음속으로 매우 의심하였다.
사헌이 서울에 도착하여 칙령을 선포하는데, 그 뜻이 매우 준엄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우리 조정이 속국을 대하는 은의는 이에 그칠 것이니, 지금부터 왕은 국도로 돌아가 나라를 다스리라. 가령 다른 변란이 발생하더라도 짐은 왕을 위하여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상은 칙령을 받고 환궁하니 밤은 이미 깊었다. 곧 선생을 불러 이르기를,“내일은 명의 사신을 만나 보고 왕위를 사양할 것이니, 경과 서로 만나 보는 것도 오늘뿐이다. 비록 밤이 깊었지만 경과 대면하여 이별하고자 불렀을 뿐이네.”하며 인하여 탄식하기를,“옛말에 영웅이 헛되게 죽는 일은 애석하다고 하였더니, 경과 같은 인재가 나 같은 부덕한 사람을 만난 때문에 많은 일을 하지 못하였네.”하니,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상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명 나라가 우리나라에 대한 염려가 지극하며, 칙서의 본뜻은 우리를 경각시키는 데 불과한데 어찌하여 이 같은 일로 사양하여 피하십니까? 신이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국사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죄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더욱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상이 이르기를,“옛날 자사(子思)는 위(衛) 나라에 있으면서도 위 나라의 쇠약함을 구제하지 못하였고 공명(孔明)은 한(漢) 나라 황실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옛사람도 간혹 그러하였다. 경의 학문과 식견이 옛사람만 못하겠는가. 단지 나 같은 부덕한 사람을 섬겼기 때문이다.”하니, 선생은 가슴이 메고 황공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다. 상이 내시를 시켜 향온(香醞)을 큰 병으로 내오라고 하여 하사하면서 이르기를,“이것으로 서로 이별하자.”하니, 선생은 통곡하여 실성하며 대답하기를,“원하옵건대 성상의 의사를 바꾸지 마소서. 내일 일은 천부당만부당하오니, 신은 감히 죽음으로 간청합니다.”하였다.
다음날 상이 명의 사신을 만나 보려고 잠시 동안 문밖 작은 방에 앉았는데, 선생이 또다시 아뢰기를,“어젯밤 분부하신 말씀은 함부로 발설하지 마옵소서.”하니, 상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상은 중국 사신을 만나 보고 소매 속에서 한 문서를 내보였다. 그 내용은, 내가 병들어 국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세자에게 양위하려 하니, 바라건대 명 사신은 주장하여 소원을 이룩하여 달라는 말이었는데, 상의 친필이었다. 사헌이 곧 필답하였다.“이제 왕의 나라가 회복된 것은 명조(明朝)의 힘이기는 하나, 역시 왕의 남은 복이 다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은 당 숙종(唐肅宗)의 고사도 있으니, 이미 이런 마음이 있다면 의당 주본을 갖추어 아뢰어 청하십시오. 저는 일개 사신일 뿐이니, 어찌 감히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끝으로,“유성룡의 남다른 충성과 독실한 인의에 대해 천조의 문무백관들은 왕이 어진 재상을 얻었다고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하였다.
회견을 마치고 상이 사공(司公)의 첩(帖)을 선생에게 보이니, 선생은 아뢰기를,“신이 이 일에 대하여 전번에도 극력 말씀을 드렸사오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고, 오늘의 일에도 참여하지 못하여 대신의 도리를 크게 잃었으니 더욱 황공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때에 총병 척금이 아침저녁으로 명 사신의 처소에 있으면서 비밀히 모의하였다. 이날 밤 선생을 초청하여 측근을 물리치고 10여 조항을 써서 제시하였는데, 그중 한 조항은 왕위를 의당 일찍 세자에게 전하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나 다른 조항에 대하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 필답하였다.“제3조는 배신으로서는 차마 귀로 들을 수도 없는 말입니다. 노야는 만 권의 책을 읽었으니, 고금의 사변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우리나라 형세가 바야흐로 위급한데, 만일 군신 부자 사이를 잘못 처리하여 타당함을 잃게 되면 이것은 거듭 화가 될 뿐입니다.”척금이 곧 필답하기를 선생의 말이 옳다 하면서, 서로 문답한 종이를 촛불에 불살라 버렸다.
다음날 선생은 백관을 거느리고 조사(詔使)에게 글을 올려 우리나라가 변란을 당한 것은 모두 중국을 위하여 의리를 지켜 변치 않은 탓이며, 우리 주상께서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어 근심하시고 부지런하시며 정성껏 힘쓰신 사실과, 난리 후에 싸우며 지키는 모든 조치의 실상을 수백 마디 말로 극력 진술하니, 사신은 그 말을 자못 믿고 받아들였다. 이날 밤 척금이 선생을 청하여 말하기를,“조사의 의사가 이미 많이 굽혔으니 달리 염려할 게 없습니다.”하였다. 선생은 손을 잡고 감사하다고 하며 말하기를,“원컨대 노야께서 시종 이와 같이 노력하여 우리나라 실정과 의사가 명조에 반영된다면 우리가 받은 노야의 은혜가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까.”하니, 척금은 순순히 승낙하였다. 이로부터 사신이 날마다 상을 접견하는데, 예모가 더욱 공손하였다.
하루는 사헌이 집정을 불러 일을 의논하려는데, 선생이 재신(宰臣) 여러 사람과 더불어 들어가니, 사헌이 단독으로 선생을 불러 측근을 물리치고 글을 써서 제시하기를,“당신네 나라에 아무 재신이 일을 주관하여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이오?”하니, 선생이 곧 필답하기를,“이 사람은 저와 한 조정에서 일을 함께 한 사람입니다. 난리 중이라 분주한 수고로움은 있었으나, 그 밖에 다른 것은 아는 바 없습니다.”하였다. 사헌이 다시 써서 묻기를,“군자는 편당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거늘 군자도 역시 편당을 합니까?”하니, 선생으로서는 매우 대답하기가 난처하였으나 곧 답변하기를,“설령 일에 잘잘못이 있다 해도 우리 임금께 말하지 어찌 감히 노야에게 고하겠습니까?”하니, 사헌이 웃으며 말하기를,“이 일은 내가 이미 알고 있소.”하였다. 이어서 명 나라 장수들의 현명하고 현명하지 못함과, 지방의 민폐 등을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옛말에 군대가 주둔하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난다고 하였으니, 대군이 경과하는데 어찌 사소한 피해가 전혀 없다고 하겠습니까만, 명조의 법도가 매우 엄격하여 모든 장수가 각자 조심하고 독려하므로 피해가 없었습니다.”하였다. 다른 문답도 다 군국의 조치 사항이었다.사헌이 돌아가려 하자 차부를 선생에게 부쳐 왔었는데, 장려하며 갖춤이 지극하여 ‘산하를 다시 만들었다.’는 말이 있었다. 선생이 벽제(碧蹄)에서 송별하는데 사헌이 손수 술을 따라 권하며 이별의 정을 표하고 떠났다.
○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이보다 앞서 경략 송응창이 요동에 있으면서 주본을 올렸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 임금이 덕망을 많이 잃어 국란(國亂)을 평정할 수 없는 군주이므로 속히 조치하여 세자에게 양위하기를 주청한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행인 사헌(司憲)이 나오게 되었고, 우리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였다.
공(公)은 피나는 정성을 다하여 화인(華人)을 감동시켰으며, 난리 중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아 왕위도 안정되었고, 국가가 그 힘을 입어 중흥이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이겠는가. 공이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소리 하나 내지 않으면서 국가의 기반을 태산같이 튼튼하게 조치하였다 할 것이다. 모든 일이 경과한 후에는 입을 막고 그 당시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신공을 거두는데도 고요히 처리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는 말도 이보다 지나지 않은 것이다.”장계를 올려 시사를 조목별로 아뢰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1. 적이 물러간 후에 호조에서는 의당 1년 경비의 숫자를 계산하여 민간에서 받아들일 물자를 정하며, 또 여러 고을의 잔패(殘敗)가 조금씩 보완된 곳에는 그 형편을 따라 전과 같이 부과하거나 혹은 반감하거나 전감하여 미리 명백히 공문으로 전달하여 백성들이 환히 알도록 한 후에 조정의 혜택이 아래로 미치게 되고 탐관오리들이 그 사이에 재주를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1. 서울 근방의 백성들이 피해가 더욱 심각하므로 그 형세가 모두 탕진되어 거의 생존할 자가 없으며, 또 기타 사방도 결단이 나서 이리저리 옮겨 구제할 길도 없습니다. 다만 신이 전날에 아뢴 소금 굽는 일은 그래도 좋으니, 이런 시기에 그 비축한 소금을 분산하되 호조의 한 사람으로 그 일을 전담하게 하여 속히 시행하소서.
1. 명년에 사용할 종자는 조정에서 미리 그 대책을 강구하였으니, 해당 부서로 일찍 계책을 세워 잘 낙착하도록 하소서. 또한 섬에 둔전을 실시하는 일도 반드시 이익이 있습니다. 10인을 하나로 짝지워 농기구와 곡식 종자도 나누어 주며 지형의 높고 낮은 것을 가려 경작하게 하여 관에서 그 반을 받아들이고 백성들에게는 그 반을 차지하게 하면 공사 간에 서로 다 편리합니다.
1. 한강 상류의 양근(楊根)과 여주는 요충지이니, 중무기와 굳센 군사로 강을 따라 목책을 설치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면 적병이 반드시 쉽게 바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한강 이남 여러 고을에서도 병졸을 수습하고 식량을 비축하여 험한 지대를 골라 방비하소서. 이 밖에 광주의 남한산성ㆍ수원의 독성(禿城)ㆍ금천(衿川)의 금지산(衿芝山)ㆍ인천의 산성(山城)은 다 요충지대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땅입니다. 만일 군대를 주둔시켜 지형의 험함을 의지하여 서로 응원하는 형세를 이루면 금원(襟苑)이 견고하고 밀착되어 민심이 믿는 데가 있을 것이니, 의당 유념하여 구분하여 조치하소서. 서해 해로의 방비도 역시 긴급한 일이오니, 별도로 수사에게 명령하여 계책을 세워 조치하도록 하십시오.
1. 영남에 적의 형세가 바야흐로 급박합니다. 지금 중국이 조공의 요청을 거절한 것을 듣고, 왜적이 고함을 지르며 노하여 결렬된 화가 아침저녁 사이에 우리나라에 덮칠 것입니다. 더구나 영남 해변의 여러 고을과 성주에서 문경까지 10여 군은 거의 수확할 것이 없는 땅이 되어 양식이 나오지 않고 군사도 징발할 수 없습니다. 믿는 것은 명 나라 군사뿐인데, 양호 역시 식량을 운반하여 접대하는 일로 말미암아 재정이 궁핍되어 남은 힘이 없으니, 백번 계책하고 천번 생각하여도 다시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신은 청하옵건대, 양호와 영남에 중신을 파견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식량을 마련하는 일 등을 주관하게 하여 군정을 정돈하고 남은 백성도 어루만져 위로하며, 정예병을 선발하여 명 나라 군사의 후원 부대를 만들어서 장준(張浚)이 독부(督府)를 개설하고 소하(蕭何)가 관중(關中)을 보완하듯 하면, 거의 인심이 흩어지지 않을 것이며 정령도 잘 시행될 것입니다.12월
다시 차자를 올려 시무를 진술하였다.
차자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왜적이 영남에 웅거하여 군대를 쉬게 하고 양식을 저축하니, 명년 봄에는 반드시 방자하게 응크렸다가 덤벼들 것입니다. 적이 만약 한번 움직인다면 호남 이북은 다시 승승장구하는 지대가 될 것이니, 만약 호남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 나라 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매번 그 요충지를 선정하여 방어 시설을 만들어 굳게 지켜 백성들로 하여금 유사시에는 진지 안으로 들어오고, 무사할 때엔 밖으로 나가 농사를 짓게 하면, 적은 진격해도 소득이 없을 것이고 후퇴하여도 뒤를 공격당할 우려가 있어 불과 수일 내에 머뭇거리다 스스로 물러갈 것이오니, 이는 오늘날의 바꾸지 못할 중요한 일입니다.
신은 여러 번 포루를 설치하는 것이 성을 지키는 이익이 됨을 아뢰었고 또 하삼도(下三道)에 공문을 보내 그들 힘에 따라 설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지금까지 한곳도 시행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럭저럭 시일이 지나 벌써 이해도 저물어 가니, 명년 봄에 닥쳐올 일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신이 살피건대, 적이 병법에 매우 익숙하고 또한 그 지대의 형세를 잘 파악하니, 진지는 반드시 좌우로 돌아볼 만한 고산 꼭대기에 구축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장수들은 전혀 이것을 알지 못하여 미리 정한 계책도 없고 기필코 지켜야 할 곳도 없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찌 적의 대군을 방어하겠습니까.
병법에 이르기를 ‘기필코 지켜야 할 성(城)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호남의 방면을 일찍이 지나 보지는 못했으나, 영남우도로부터 서쪽으로 남원ㆍ순천ㆍ전주ㆍ나주는 모두 기필코 지켜야만 할 지역입니다. 비록 성이 있다 하더라도 상상하건대 반드시 허물어졌을 것이오니 의당 지금 수축하여야 합니다. 포루 같은 것은 공역이 많이 들지 않으니, 3ㆍ4월 적이 움직이기 전에 오히려 수축할 수 있습니다. 산성을 수축하는 일은 지난번에 누누이 아뢰었습니다. 장성 현감 이귀(李貴) 같은 자는 이에 한낱 작은 고을의 수령인데도 오히려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수축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남우도가 비록 심하게 파괴되었다고는 하나 수습하여 조치할 길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신은 처음부터 호남을 보존하려면 그 방어를 의당 영남우도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도를 한번 잃게 되면 호남은 방어할 곳이 없는 땅이오니, 사면으로 공격하는 적의 형세를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신이 전번 가을 우도에 있을 적에 의령ㆍ삼가ㆍ고령ㆍ단성ㆍ안음 등 여러 곳을 돌아보니 지세가 매우 험악하고 옛 성도 모두 있으니, 만일 조금만 더 수축하여 백성들에게 살길을 권장하면 그들은 의당 즐거이 따를 것입니다. 호남에는 이미 재삼 신칙하였으니, 영남우도에는 따로 도원수에게 명을 내리어 그들로 봄 농사를 시작하기 전을 이용하여 점차로 성을 수축하게 하고, 그 근방의 백성들을 각자 편리한 대로 그 성안에 들어와 살게 하며, 공사 간에 축적된 양식을 그 성안에 모아 시설물과 들판을 깨끗이 하여 대비하면 우도는 거의 지탱할 가망이 있습니다.”상의 명을 받들어 금중에 들어가 숙직하였다.
호서의 역적 송유진(宋儒眞) 등이 군중을 모아 노략질하고 서울을 향하여 오니 외구가 물러가기도 전에 내란이 또 일어났다. 성안의 군졸은 수천 명에 지나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소동이 일어나 아침저녁을 보전할 수 없었는데, 선생은 행동이 태연하여 두려워하는 말과 낯빛이 없으니, 조야가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상이 선생과 병판 이덕형(李德馨)에게 명하여 대궐 안에 들어와 숙직하게 하니, 선생은 아뢰기를,“이처럼 국가가 위태롭고 민심이 불안한 때에 급히 대신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호위하게 하시면 민심이 더욱 놀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상이 다시 은밀하게 이르기를,“나는 경을 의지하여 장차 큰일을 하려고 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자신을 아끼지 않는가. 옛날 무원형(武元衡)의 일을 보지 못하였는가.”하니, 선생은 마지못하여 병판과 같이 궁중에 들어가 숙직하였다. 하루저녁은 매우 추웠는데 상이 내시를 시켜 엿보라고 하니 내시가 돌아와 아뢰기를,“영상이 촛불을 켜 놓고 홀로 앉아 사서를 보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곧 명하여 술을 데워 내려 주었다. 얼마 후에 역적이 사로잡히자, 선생이 위관(委官)으로 옥사를 공정하게 다스려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국초에는 의금부의 신장(訊杖)은 크고 작고 두텁고 엷은 것이 다 정한 제도가 있었는데, 그후에 법이 점점 퇴락하여 신장이 커서 거의 들 수 없었으니, 죄인은 대개 고문하는 도중에 죽었다. 선생은 아뢰어 신장과 태장(笞杖)을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를 것을 주청하였다. 이로부터 죄인이 한 사람도 남사(濫死)한 자가 없었다.- [주-D001] 삼로신(三虜臣) : 임진왜란 때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을 시종하여 함경도로 피란하면서 근왕병을 모집하다가 회령(會寧)에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사로잡힌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을 비롯하여 황혁(黃赫)ㆍ이영(李瑛)을 말한다.
- [주-D002] 학철지어(涸轍之魚) :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속에 있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사람이 아주 곤궁한 처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 [주-D003] 무원형(武元衡)의 일 : 무원형은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으로 덕종이 군사 일을 전임시켜 채(蔡)를 토벌하였는데, 조회에 들어가는 도중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唐書 卷158 武元衡列傳》